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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역사를 갈랐다] (14)송시열과 윤휴

[선택! 역사를 갈랐다] (14)송시열과 윤휴

입력 2012-06-04 00:00
업데이트 2012-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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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3년(효종 4년) 여름, 논산의 황산서원에서는 이 지역의 유력한 학자들이 모인 가운데 작지만 만만치 않은 의미를 지닌 소동이 일었다. 송시열(1607~1689)이 친구 윤선거(1610~1669)에게 윤휴(1617~1680)와 절교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비슷한 연배였던 세 사람은 젊었을 적부터 서로 교유하고 있었고, 윤선거와 윤휴는 특히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송시열의 주장은 주희와는 다르게 ‘중용’을 해석한 윤휴는 주자학의 세계를 어지럽히는 도적과 같은 존재, 곧 사문난적(斯文賊)이므로 그를 조선 사회에서 고립시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와의 사귐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이 시기 조선 사상계의 지형이 어떠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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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윤선거에게 윤휴와 절교 요구

송시열이 이때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치고 배격한 것은 조선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사상으로서 주자학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주자학을 비판하고 그와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가 하고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주자학을 벗어나게 되면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이 송시열의 판단이었다. 이 무렵, 조선에는 윤휴의 ‘중용’ 해석이 화제가 되고 있었다. 송시열이 이 사실을 알고는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윤선거로 하여금 그와 절교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윤휴의 의식은 송시열과는 달랐다. 주희의 학문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굳이 그의 사유체계를 묵수(墨守·제 의견이나 생각, 또는 옛날 습관 따위를 굳게 지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주희의 경전 이해를 그대로 따르려 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중용’ ‘대학’ ‘효경’을 중시하여 자신의 시각으로 새로운 해석을 가했다. 송시열이 특히 문제로 삼았던 책이 ‘중용’이었지만 윤휴는 이 책과 함께 다른 경전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자기 생각을 세우고 있었다. 이들 세 책에 대한 그의 이해와 해석에는 당대 조선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지니지 못하던 새로운 내용이 실려 있었다. 주희의 해석을 통하지 않더라도 공자의 사상, 유교의 이상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 이들 경전을 해석하는 윤휴의 생각이었다.

이와 같이 주자학의 이해를 둘러싸고 송시열과 윤휴는 정반대의 태도를 취했다. 조선에서 이전에도 특정 사상의 수용과 이해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일기도 했지만, 17세기 중·후반 두 사람 사이에 생겼던 대립만큼 격렬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주자학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 차이 그리고 이로부터 오는 갈등은 단순히 주자학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이 시기 조선 사회의 현실 문제를 인식하고 그 대책을 세우는 것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랬기에 그 대립의 강도는 엄청났다.

●임진난·병자호란·당쟁 등 조선 무너뜨려

17세기 중·후반의 조선 사회는 앞서 50~60여년간 겪은 여러 사태로 말미암아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1592년 일본 침략과 긴 시간의 전쟁, 광해군대와 인조대 여러 정치세력 간의 갈등, 1636년 청나라 침략과 패배와 같은 사건은 기존 조선 사회의 질서를 바탕부터 무너뜨렸다. 특히 청나라의 침략, 곧 병자호란은 사태를 악화시킨 결정타였다. 전쟁을 거치며 조선은 인적·물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봤고, 외부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허약한 국방체제, 군사적 대응 능력을 고스란히 노출했다. 더군다나, 종래 오랑캐로 여기던 청나라에 굴복하여 군신의 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사대해야 했다. 종래 유지되던 조선과 명의 관계 또한 끊어졌다.

기막히기 그지없는 현실이 만들어졌다. 효종과 같은 국왕을 비롯한 많은 수의 위정자들은 분노와 치욕에 떨며 청나라에 복수하고 원수를 갚고자 했다. 최선의 방도는 청나라와 전면전을 벌여 군사적으로 응징하는 일, 곧 ‘북벌’이었다. 이리하여 북벌은 이 시기의 시대정신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중국까지 진출하며 명나라를 멸망시킨 위력을 가진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북벌의 속도, 방법, 내용을 둘러싸고 분분하게 의견 대립이 일었고, 그 중심에 송시열과 윤휴가 서 있었다.

●극단적 주자학 vs 부국강병책

송시열의 극단적 주자학 강조는 국정 운영의 전반적인 기조를 강력한 도덕주의 위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군주와 신료 등 국정을 이끄는 주체들은 주자학의 가르침에 따라 도덕주의를 실천하며, 강상(綱常) 윤리를 강화하여 사회 기강을 잡을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현재 상황에서 직접 군사적으로 대결하는 것은 어려우므로 긴 시간 동안 실력을 쌓아 오랑캐의 국가로부터 당한 모욕을 갚을 것을 강조하였다. 현실적으로 오랑캐의 지배를 받는 굴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오랑캐를 능가하는 절대의 정신력을 배양하고 문화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 송시열의 생각이었다. 이렇게 한다면 청나라가 지배하고 있는 중국에서 유린당하는 ‘문명’을 조선이 지켜내고 궁극에는 청나라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윤휴 역시 조선에서 회복하고 실현해야 할 것은 강상과 윤리를 강화하는 것이라 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조선 국정 운영의 방향을 송시열과는 다르게 생각했다. 윤휴는 조선에 필요한 것은 빠른 속도로 부국강병 체제를 만드는 것으로 생각했다. 동시에 청나라와는 직접적인 군사 대결을 통해 그 원수를 갚을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그는 종래와는 달리 국가 권력이 토지와 백성을 빠짐없이 파악하고, 양반들의 특권을 어느 정도 제한하며, 군대 편제를 새롭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쟁 수행을 위해서는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대로 한다면, 종래 조선의 제도와 체제는 매우 크게 변하게 되어 있었다. 윤휴의 북벌 주장은 실질적인 정책과 연관하여 추진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윤휴의 독자적인 경서 해석은 이러한 현실 대책을 밑받침하는 근거를 경전을 통해 찾고자 하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입으로만 외친 북벌, 사대부가 지지

송시열과 윤휴의 생각은 북벌을 서로 강조하는 점에서는 외형상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를 준비하고 대응하는 방식에서 양자는 서로 달랐다. 송시열의 북벌 주장은 당장의 행동보다는 먼 미래의 결정타를 예비하자는 것이었다. 반면, 윤휴의 움직임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며 행동주의적이었다. 송시열의 방법은 사상적으로는 매우 강경하되 실제 군사적·정치적·경제적 측면에서의 변화를 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윤휴의 방식은 사회의 급속한 변화를 이끌어내며 기존 질서를 크게 뒤흔들 가능성이 컸다. 군사적 행동을 중시하는 측면에서 이 생각은 강력한 국가권력에 기초하여 정치·사회 운영을 도모한다는 점을 필연적으로 드러내었다.

이처럼 송시열과 윤휴의 생각은 크게 달랐다. 두 사람이 주자학을 강조하고 또 주자와는 다른 해석을 하려는 데는 그만한 정치적 혹은 현실적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의 학문적, 정치적 방향 설정은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송시열과 윤휴의 선택을 좌우하게 한 요소는 일단 군사 강국 청과 군사 대결을 벌일 것인가, 그 대결에서 이길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판단이었다. 송시열은 사상적·문화적 방면으로의 체제 강화를 선택했다. 조선은 중국의 문명을 이어받은 ‘소 중화’의 국가이며, 이를 강력하게 실현하는 것을 통해 오랑캐의 강국 청나라를 이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 위에서였다.

반면 윤휴의 경우, 청의 군사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조선은 대적하여 원수를 갚을 수 있으며 이를 위해 빠른 속도로 부국강병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송시열과 윤휴의 판단과 선택에 대해 조선의 정치 사상계는 송시열을 지지하였다. 숙종이 즉위하고 나서 세워진 남인정권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했던 윤휴는 숙종 6년 정국 주도권이 서인으로 넘어가자 유배의 벌을 받았고 결국에는 사약을 받았다. 윤휴의 방식을 지지하고 긍정한 것은 소수였다. 그의 유력한 지원자들, 혹은 그와 친하게 지냈던 이들도 그의 생각이 매우 위험하며 불원간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청과의 직접적인 군사적 맞대결이 위험하다는 것을 대부분의 정치 엘리트들은 알고 있었다. 윤휴의 선택과 판단은 정치적으로 보아 비토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숙종 6년, 윤휴를 처벌한 것은 어떤 면에서는 조선에 매우 위험한 요소를 영원히 추방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송, 조선 후기 장악… 윤, 북학으로 수용

송시열의 승리, 윤휴의 패배는 조선의 정치사상계가 군사주의적 방향으로의 국정운영, 강력한 국가를 전망하는 흐름을 배제해 나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선의 정치사상계는 이후 우여 곡절을 겪지만, 송시열이 강조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주자학의 영향력이 더 확대되었으며, 주자학의 질서를 위협하는 요소는 지속적으로 배격받았다. 그렇다고 하여 윤휴의 생각이 조선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8~19세기 서울·경기 지역의 남인들 가운데 일부는 윤휴의 생각을 자양분으로 하여 그들의 생각을 세우기도 했다. 18세기 후반 경기도 지역의 천주교 수용에 일정한 역할을 했던 녹암 권철신과 같은 이는 윤휴의 ‘대학’ 이해를 적극적으로 추종했고, 다산 정약용 또한 윤휴의 생각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윤휴의 생각은 후학들의 새로운 사유 속에 스며들며 그 생명력을 유지했다.

정호훈(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2012-06-04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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