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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인맥 대해부 (5부) 업종별 기업&기업인 <10> 광동제약] 청심원·쌍화탕·비타500… 고품질 강조한 ‘최씨 고집’ 있었다

[재계 인맥 대해부 (5부) 업종별 기업&기업인 <10> 광동제약] 청심원·쌍화탕·비타500… 고품질 강조한 ‘최씨 고집’ 있었다

명희진 기자
명희진 기자
입력 2015-07-12 23:32
업데이트 2015-07-13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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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최수부 회장의 광동제약 신화

광동우황청심원, 광동쌍화탕, 비타500, 옥수수수염차, 헛개차…. 광동제약의 굵직굵직한 대작들에는 ‘정직’과 ‘신용’을 강조하는 최씨가의 진득한 고집이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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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동제약의 창업주 고 가산 최수부 회장(2013년 7월 작고)은 1936년 일본 후쿠오카현에서 5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해방 후 부모님과 귀국해 외가가 있는 경북 달성군 화원면에 정착했지만 부친의 병환으로 소학교를 중퇴한 그는 집안 생계를 책임지는 소년 가장이 됐다.

고인은 12세부터 시장에서 청과물을 팔았다. 시장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배운 건 ‘신용’과 ‘정직’이었다. 그는 살아생전 “자신이 파는 물건이 무엇이 됐건 질 떨어지는 물건을 속여서 파는 일만은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대부분 한 번 얼굴 보면 다시 마주칠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겠지만 부실한 물건을 판다면 언젠가 그 죄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생각에서였다. 그저 많은 이익을 남기고 보자는 생각도 경계했다.

고인은 1960년 봄 제약업에 첫발을 들인다. 군제대 후 서울에 정착한 그는 ‘경옥고’ 영업사원으로 취직했다. 경옥고는 ‘고려인삼산업사’에서 파는 보약으로 2만환의 가격은 당시 웬만한 회사원의 한 달 월급에 맞먹었다. 외판 영업의 환경은 척박했다. 다짜고짜 쫓겨나는 경우도 있었고, 가격이 비싸 거절당하는 일도 많았다. 고인은 상대방이 언젠가는 고객이 될 수 있다는 믿음에 따라 약을 사주지 않더라도 섭섭해하거나 원망치 않았다.

그는 을지로와 종로 주변의 고급 양복점을 집중 공략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양복점을 찾는 이들이라면 형편이 괜찮을 테고, 비싼 약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골손님을 타고 입소문이 났다.

1년 후 그는 동업 형태로 경옥고 판매회사인 대한인삼제약사 대리점을 연다. 2년 만에 당초 목표했던 창업 자금인 300만환을 마련했다. 이 자금이 지금의 ‘광동제약’을 만든 씨앗이 됐다. 1963년 그는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185에 땅을 하나 구입했다. 100㎡(약 30평) 부지에 공장을 세우고 사원을 채용한 뒤 한방의약품 개발에 나섰다.

1971년 보약 가미녹각대보정, 변비약 쾌장환, 부인병치료제 비너스 환 등을 개발해 팔아온 광동제약은 1973년 12월, 광동제약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광동우황청심원을 선보였다. 우황청심원에는 한방제제를 과학화해 명약을 만들겠다는 고인의 꿈이 담겼다. 고인은 최상급 재료를 구하기 위해 홍콩, 대만은 물론 국내 각지를 쏘다니고 밤낮 없는 연구와 실험에 매달렸다.

1975년 7월에는 쌍화탕을 생산하고 있던 서울 신약을 인수합병해 ‘광동쌍화탕’을 내놓았다. 문제는 가격경쟁력이었다. 좋은 재료를 고집하다 보니 광동쌍화탕은 당시 시중에 출시되고 있는 쌍화탕보다 2배나 가격이 높았다. 누가 사 먹겠냐는 우려가 파다했지만 고인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최씨 고집을 알아준 건 소비자였다. 좋은 재료만 고집한 광동쌍화탕은 이후 놀라운 성장세를 이어갔고 광동제약의 효자상품으로 자리잡았다.

1977년 구속 수감되는 치욕도 있었다. 광동제약 대리점을 운영하던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이 수금이 제때 이뤄지지 않아 약품 공급을 중단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자신이 보좌했던 국회의원에게 거짓 정보를 제보한 것이었다. 약사법 위반과 탈세 혐의였다.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고인은 곧바로 항소했고 2심은 이를 뒤집어 무죄를 선고받았다. 외환위기 때는 부도 사태까지 있었다. 긴급 자금대출을 받아 최종 부도 위기 하루 전 이를 무마했지만 꼬리를 무는 부도설과 주식 매매거래 중단 조치 등 후폭풍이 엄청났다.

위기에서 먼저 힘을 보탠 건 임직원들이었다. 1998년 5월 광동제약 노동조합은 전 사원의 1998년분 상여금을 전액 자진 반납했고, 1998년 6월에는 경영 정상화와 노사화합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해 뜻을 하나로 모았다. 고인도 1998년 11월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주식 10만주를 외환위기로 고통받고 있는 전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양도해 화제를 모았다.

위기를 막 벗어난 광동제약에 날개를 달아준 제품은 바로 ‘비타500’이다. 광동제약은 당시 고인의 진두지휘 아래 제품 기획 단계에서 국내 100여개 업체 530여개 품목에 달하는 비타민C 제품에 대해 면밀한 시장 조사를 벌였다. 비타민C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지만 간편히 섭취할 수 있는 제품이 시중에 없었다. 고인은 비타민C를 신맛이나 강한 맛을 줄여 드링크제로 만들어 마시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 전략은 대박을 쳤다.

출시 두 달 만인 2001년 4월 비타500은 400만 병이라는 경이적인 판매실적을 기록했다. 다시 두 달 후인 6월에는 2000만 병의 판매실적을 기록했다. 발매 첫해인 2001년 비타500은 53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국내 비타민 시장의 최고 화두로 떠올랐다.

이렇게 벌어들인 수익은 신약 개발에 투자됐다. 고인은 신약 개발 전담조직인 연구개발연구소(R&DI)를 직접 이끄는 등 신약 개발에 애착을 보였다. R&DI는 중장기적으로 뛰어난 신약을 개발, 발매하는 핵심 연구조직이다. 기존 의약품개발본부는 복제약 개발과 글로벌 신약 도입 등 단기 과제에 역량을 집중해 나갈 수 있도록 했다.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고인은 2013년 7월 24일 여름휴가 중 골프장에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창립 50주년을 불과 석 달 앞둔 시점이었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2015-07-13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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