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의 시골살이] 나는 진짜 부자

입력 : 2017-06-19 22:38 ㅣ 수정 : 2017-06-20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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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가 잡초 요리에 대한 책을 낸 뒤 가끔 잡초 요리를 경험하고 싶다며 불쑥불쑥 ‘불편당’(우리 집 당호)을 찾는 분들이 있다. 평소 문을 열고 가객을 접대하는 일을 소중히 여겨 온 우리는 그렇게 찾아오는 분들에게도 집 주변에 자라는 잡초를 뜯어 소박한 밥상을 차려 드리곤 했다.

얼마 전에도 잡초에 깊은 관심을 가진 두 가족이 찾아오셨다. 부부들이었다. 한 가족은 부인이 젊어서 시각장애를 겪었다고 했다. 결혼 3년 만에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무려 30년이 넘도록 눈먼 아내를 돌보는 곁님의 사랑이 극진해 보였다. 우리는 그 부부의 사랑에 감동해 더 정성껏 잡초 요리를 준비해 대접했다.
고진하 시인

▲ 고진하 시인

식사를 마친 뒤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아내가 무심코 잡초를 키울 밭이 더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잡초를 인류 미래 식량의 대안으로 생각하는 우리는 집 앞의 텃밭에 잡초를 키우는데, 텃밭이 너무 협소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아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한 그분들은 잡초 농사를 지을 만한 밭이 있으면 마련해 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말씀만 들어도 고맙다고 처음엔 사양했다. 농지값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들은 기어이 우리로 하여금 마땅한 땅을 알아보게 한 후 곧 등기 절차까지 밟았다. 이렇게 하여 기적처럼 우리가 소원하던 땅이 마련되었다. 얼마나 각박한 세상인가. 그럼에도 자기 호주머니를 아낌없이 여는 이런 분들 때문에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한 것이 아닐까.

땅은 그리 넓지 않다. 서생으로 살아온 우리 부부가 농사짓기에 딱 적당한 평수의 땅이다. 힘겨울 때도 잡초처럼 씩씩하게, 명랑하게 살기로 작정한 우리 부부의 뜻을 깊이 헤아려 준 천사들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새로운 땅이 생겼지만, 땅에 집착하지 않는다. 땅에 집착하는 건 내가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부동산 투기꾼처럼 땅이 나에게 속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닌가. 물론 소유권이란 게 있지만, 소유권이 영원한 것이던가. 조금만 마음눈을 크게 열고 보면 지구 위의 땅들은 계속 소유자가 바뀐다. 아무리 땅이 많아 떵떵거리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땅에 잠시 머물다 사라질 뿐이다.

허균의 ‘한정록’에는 우리가 새겨 둘 만한 이런 구절이 있다. “산에 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거기에 미련을 가지고 연연하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있는 것과 같고, 서화 감상이 고상한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거기에 탐욕을 내면 서화 장사꾼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대자연을 삶의 스승으로 여기는데, 잡초 또한 그걸 일러 준다. 지난해까지는 텃밭에 비름나물이 대세였다. 올해 들어 비름나물이 온통 뒤덮었던 땅을 명아주와 속속이풀과 엉겅퀴가 차지했다. 땅을 서로 차지하려는 풀들의 경쟁을 나는 바라볼 뿐 그 속내를 깊이 헤아리지 못한다. 내년에는 어떤 녀석들이 텃밭을 점령할지 나는 알지 못한다. 잡초 요리를 즐기는 우리 부부는 하늘이 우리에게 필요한 잡초를 주시리라 믿고 오로지 하늘에 순응할 뿐.

해 질 녘이었다. 텃밭에 엎드려 잡초를 낫으로 베고 있는데, 평소 뜸쑥한 뒷집 할머니가 입을 떼어 물으신다. “잡초 농사지을 밭을 구입하셨다면서요?” “우리 명의로 구입한 건 아니고요. 농사지으라고 우리가 아는 분들이 사주신 거예요.” 할머니는 다소 실망한 눈치다. “그런데 소문은 고선상네가 샀다고 났어요.” “아무렴 어때요. 우리가 농사짓는 동안은 우리 땅이죠.”

진심이다. 하늘을 소유할 수 없듯이 누가 땅을 소유할 수 있단 말인가. 내 말뜻을 알아들은 할머니가 한술 더 뜨신다. “고선상네는 진짜 부자네요.” 나는 할머니에게 엄지를 척 세워 보인다. “네, 부자 맞아요. 마을 논밭가의 잡초를 뜯어먹으니, 우리 마을의 논밭도 다 우리 소유죠.” 할머니는 어이가 없는 듯, 그러나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벙긋 웃으며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신다. 뉘엿뉘엿 지는 해가 뱀 꼬리만큼 서산에 걸렸다. 나는 불콰한 얼굴의 해님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린다. 남은 생은 자족하는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겠다고.

2017-06-20 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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