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우리가 지나는 땅을 되짚어 보면

입력 : ㅣ 수정 : 2020-03-26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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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열리는 이맘때 봄 풀꽃들이 색색의 꽃을 피운다. 냉이(왼쪽부터), 제비꽃, 꽃다지는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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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열리는 이맘때 봄 풀꽃들이 색색의 꽃을 피운다. 냉이(왼쪽부터), 제비꽃, 꽃다지는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꽃들이다.

내 작업실 뒤엔 주차장을 둘러싼 기다란 화단이 있다. 이곳엔 서양측백나무와 당단풍나무, 스트로브잣나무와 서양자두나무 등 평범한 도심 정원에서 흔히 볼 법한 나무들이 있다. 이 화단을 참 좋아한다. 나무 꽃이 아름답고 열매가 맛있어서가 아니라, 화단에 피어나는 다채로운 풀꽃들 때문이다.
이소영 식물세밀화가

▲ 이소영 식물세밀화가

이맘때면 로제트 잎을 가진 봄 풀꽃들이 색색의 꽃을 피워 낸다. 누가 심지도 않았는데 부지런히 피어난 꽃들이 어찌나 기특한지 나는 요즘 땅만 들여다보고 다닌다. 이맘때 늘 그랬다. 오늘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작업실에 들어오기까지 30분 이상 걸렸다. 오늘 만난 꽃은 꽃마리와 봄맞이꽃, 쇠별꽃, 냉이, 큰개불알풀, 서양민들레, 꽃다지다.

이들은 흔히 잡초라 불리는 풀이다. 내가 이 이름을 나열하면 주변 식물학자들은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주 흔한 풀이지만, 꽃을 보러 어딘가로 나서지 않아도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도시 일상에서 스스로 자라고 피어난 꽃을 만난다는 것은 지금과 같은 시기엔 마치 숲에서 희귀식물을 보는 것만큼 소중한 일이다.

게다가 꽃마리나 쇠별꽃, 냉이와 꽃다지 등은 모두 꽃이 지름 0.5㎝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풀이라 땅에 얼굴을 가까이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주차장에서 쪼그려 앉아 꽃을 보고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슨 귀한 게 있냐며 함께 땅을 들여다보는 일이 생긴다. 물론 이건 이 주차장에서만 있을 법한 일이 아니다.
꽃마리 역시 이맘때 흔히 볼 수 있다. 줄기 끝이 말려 ‘꽃마리’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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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마리 역시 이맘때 흔히 볼 수 있다. 줄기 끝이 말려 ‘꽃마리’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몇 년 전 덴마크의 한 미술가가 한국에서 식물 관련 전시를 진행했고, 그를 도와 서울 서촌의 한 공터 식물들을 조사한 적이 있다. 그는 공터의 식물로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에게 식물종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 흥미로운 건 도심 한가운데 건물이 철거된 자리,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30평 남짓의 공터에 40종 이상 식물이 존재하며 10종 이상의 꽃은 만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식물 중에는 제비꽃이나 꽃마리가 있었다. 보라색 제비꽃은 흙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자란다. 심지어는 부서진 시멘트와 콘크리트 사이에서도. 우리나라에 제비꽃만 해도 40여종이 자생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들은 변이가 다양해 식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제비꽃속 중 유럽 원산의 삼색제비꽃과 다른 4종을 교배해 만든 것이 겨울과 초봄 정원을 화사하게 만들어 주는 꽃, 팬지다.

옅은 파란 꽃잎을 가진 꽃마리 역시 도시에서 흔히 보이는 풀꽃이다. 줄기 끝이 말려 꽃마리라 이름 붙여졌는데, 가끔 꽃마리나 참꽃마리 사진을 지인들에게 보여 주면 실제 크기를 짐작할 수 없어서인지 물망초냐고 묻는다. 이들은 물망초와는 먼 친척뻘이고 꽃이 훨씬 작다. 물망초는 원예종으로 개량돼 꽃집에서 볼 수 있지만 꽃마리는 길에 흔하다.

이처럼 꽃집에서 보는 화훼식물과 이 풀꽃들을 연관 지어 떠올리다 보면 풀꽃의 아름다운 가치에 결코 소홀할 수 없다. 나와 함께 공터를 조사한 미술가는 이 다채로운 풀꽃들로 꽃다발을 여러 개 완성했고, 꽃다발 사진은 미술관에 전시되었다. 전시를 본 사람들은 이것이 모두 ‘잡초’라 불리는 식물로 만든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최근 코로나19의 여파로 몇몇 국공립 식물원이 문을 닫았고, 꽃축제는 모두 취소되고 있다. 당분간 멀리 이동하는 걸 금기하는 상황이 계속될 것이다.

물론 이건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틀 전, 세계적인 식물원인 영국의 큐가든은 앞으로 그들이 가진 식물 컬렉션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직원과 봉사자들을 건강하게 지키는 것이라며 잠정적으로 방문객 입장을 금지했다. 지금 한창 열리고 있어야 할 세계적인 알뿌리꽃축제인 네덜란드 퀴켄호프는 개최가 무기한 연기됐다. 공지 글에는 ‘이미 꽃은 피었지만, 문을 열 수 없다’고 쓰여 있다. 이미 피어난 꽃의 가치와 그간의 수고를 생각하면 아쉽고 아깝지만 나 역시 이들의 결정을 지지한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우리 가까이에 존재해 온 들꽃을 들여다보기 좋은 때가 아닐까 싶다. 재정적으로 힘들, 가까이의 사립식물원에 가거나 동네 꽃집에서 꽃을 사는 것이 올봄을 느끼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그리고 집 안의 실내식물들로 나의 자연 욕망이 다 채워지지 않는다면 내가 늘 지나는 땅을 되짚어 보았으면 한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길에 지나는 아파트 단지 내 화단과 주택 마당의 시멘트 틈 사이, 혹은 회사 주차장의 작은 화단에서 풀꽃들은 이미 그들만의 꽃축제를 벌이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잠시 걸음을 멈춰 고개를 숙이고 땅을 들여다보는 사람만이 입장할 수 있는 봄꽃 축제다.
2020-03-26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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