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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시선 거두었더니 여성 서사를 품게 되더라”

“남성의 시선 거두었더니 여성 서사를 품게 되더라”

이슬기 기자
입력 2020-08-12 17:06
업데이트 2020-08-1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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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우리의 정류장과…’ 펴낸 김이설

내 시선이 세상의 시선이라 믿었지만
누군가에겐 아픔이자 상처가 되기도
2015년 전후 ‘페미니즘 리부트’ 계기
여성 현실 가혹했던 묘사 부드러워져
슬럼프 극복 후 쓴 책이라 더욱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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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설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에는 박소란, 이제니 등 작가가 발췌한 여성 시인들의 시 일부가 나온다. 시를 그렇게나 좋아하면서 직접 시를 쓸 마음은 없었을까. “압축하기보다는 풀어내는 데 익숙한 몸이라 생각해서,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는 작가는 “그래도 시를 ‘잘 읽는 몸’이고 싶어서, 대학 때 시 창작 수업을 들었는데 과제로는 꼬박꼬박 소설을 써냈다”며 웃었다. 오장환 기자 5zzang@seoul.co.kr
김이설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에는 박소란, 이제니 등 작가가 발췌한 여성 시인들의 시 일부가 나온다. 시를 그렇게나 좋아하면서 직접 시를 쓸 마음은 없었을까. “압축하기보다는 풀어내는 데 익숙한 몸이라 생각해서,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는 작가는 “그래도 시를 ‘잘 읽는 몸’이고 싶어서, 대학 때 시 창작 수업을 들었는데 과제로는 꼬박꼬박 소설을 써냈다”며 웃었다.
오장환 기자 5zzang@seoul.co.kr
연극으로도 만들어진 김이설의 초기작 ‘환영’(2011)을 읽은 사람이라면 백숙을 기억할 것이다. 주인공 윤영은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무능력한 남편 대신 교외 백숙집에서 일하다 남성들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한다.

신작 장편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에서 무기력한 가장인 아버지가 좋아한 음식은 백숙 같은 고깃국이다. “하기 쉽고, 값싼 보양식이죠. ‘환영’ 속 백숙이 탐욕스러운 공간의 매개체 역할이었다면, 여기서는 좀더 일반적이고 모두에게 편한 느낌이에요.”

지난 10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만난 작가가 말했다.

신작은 종이책 한정판 소장본과 무제한 전자책 이용을 함께 제공하는 밀리의서재 오리지널 에디션으로 출간됐다. 오는 10월에는 출판사 작가정신에서 단행본으로도 나온다. 출간 소감을 묻는 질문에 작가는 “글을 못 쓰던 시기를 통과해 나온 책이라 의미가 남다르다”고 했다. 2015년부터 2~3년, 작가에게 슬럼프가 찾아왔다.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지 10여년. ‘인풋’ 없이 ‘아웃풋’만 있었던 데서 온 결과였다. 문자에 대한 환멸이 와서, 청탁받은 원고들을 연이어 펑크 냈다. 그때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게 시라고 작가는 회상했다. “글쓰기 전에 워밍업 하듯이, 저는 시를 읽는 걸로 언어적 감각을 깨우고 나서 소설을 써요.” 자신이 좋아하는 시와 습작 시절, 두 딸을 돌보며 가사노동을 하는 현재 모습까지, 신작에 다 들어가 있다고 그는 소개했다.

낡고 오래된 목련빌라에는 무기력한 경비원 아버지와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 온 어머니, 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을 피해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나온 동생이 있다. 집에 주저앉은 신세가 된 ‘나’는 두 조카를 건사하고 꼬박 가사에 시달리다 연인과도 이별을 고하게 된다. 시인을 꿈꾸며 오로지 스스로에게 집중하던 ‘필사의 밤’은 어느덧 무력해진다. 그는 “‘나’는 엄마와 같은 위치는 아닌데, 엄마와 같은 역할을 아무렇지 않게 수행”하는 ‘K장녀’(Korea+장녀)에 대한 서사라고 말한다.

가부장제 아래 희생양으로서 김이설 소설 특유의 여성이 처한 현실 인식은 비슷하지만, 징그럽다 싶을 만큼 작중 화자에게 가혹하던 김이설이 이젠 달라졌다. 후배들로부터 “나이 들더니 유해졌다”는 평도 더러 듣는단다. “전에는 화자를 끊임없이 밀어냈어요. 해결 방안이 없는 문제들만 작정하고 생기는 식이었죠. 작가인 내가 품으면 변명이 되고 투정이 되지만, 쓰는 사람까지 밀어내면 읽는 독자가 거둬 주리라고 생각했어요.”

최근 몇 년 새 겪은 슬럼프와 한국 사회에 불고 있는 ‘페미니즘 리부트’(2015년을 전후로 한 페미니즘 붐)가 계기가 됐다고 했다. “전엔 제 시선이 곧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남성의 시선임을 알게 됐다”고 고백했다. “‘이게 현실’이라고 보여 줬던 것들이 실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시킨 것들이었고요. 누군가에겐 아픔이 되고 상처가 되는 발화라면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봐야 하는 부분 아닐까….”

그렇게 작가는 이제 밀어내기를 멈추고, 부지런히 품는 노력을 한다. “나는 늙어도 소설은 늙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후배들과 세상의 목소리를 들으려 노력한단다. 소설 속 백숙의 의미가 달라진 것도 거기에서 오는 듯하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까지는 안 돼도, 온 가족을 한자리에 모으는 값싼 단백질원이라는 본령에는 충실하게. 좀더 다정해진 백숙의 의미처럼 책도 ‘해피엔딩’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2020-08-13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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