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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은 연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프트카드(무기명 선불카드) 이용이 잦은 연말 연시를 틈타 전국적으로 기프트카드(우리BC·기업BC카드) 복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범인은 모두 검거됐지만 법정에서 책임 소재 공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해당 은행들은 “기프트카드를 제3자에게 양도하는 과정에서 위·변조 피해를 입었다면 책임이 없다”는 약관을 들이밀고 있습니다. 반면 피해자 변론을 맡고 있는 전석진 법무법인 한얼 변호사는 “위·변조 방지 장치를 애초에 탑재하지 않은 은행 과실이 크다”고 반박하고 있죠.
최근 1심 법원은 기프트카드 피해자 손을 들어 줬습니다. 기업은행에 500만원을 변상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기업은행은 곧바로 항소했습니다. 1심 변론 기일에 출석조차 하지 않았던 기업은행 측 변호사는 ‘100% 승소’를 자신하고 있습니다.
기업은행이 500만원이 아까워 항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피해자들의 줄소송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커 보입니다. 국정감사를 받아야 하는 국책은행 처지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증좌’를 남겨 꼬투리를 잡히지 않겠다는 계산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더라도 뒷맛은 씁쓸합니다. 연간 기프트카드 판매 금액은 8000억원 가까이 됩니다. 사용하지 않은 기프트카드 낙전 수입만도 해마다 250억원가량입니다. 이 돈은 고스란히 은행이나 카드사 주머니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시중에 유통되는 유가증권(백화점상품권, 문화상품권 등) 중에서 유일하게 위·변조 방지 장치가 없는 것이 기프트카드입니다. “한 번 사용하고 버리기 때문”이라는 게 금융사들의 ‘궁색한’ 변명입니다. 20만원 이상 고액권에 한해서라도 위·변조가 불가능한 집적회로(IC)칩을 탑재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됐지만 금융사들은 ‘제조 원가 상승’을 이유로 줄곧 무시해 왔습니다.
기업은행이 배(변상금)보다 배꼽(소송비용)이 더 큰 소송을 선택하며 ‘뚝심’을 자랑하기보다는 소비자 권익 보호를 먼저 생각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국민 모두가 거래하는 은행’에서 판매하는 상품은 ‘국민 모두가 믿고 이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유미 기자 yium@seoul.co.kr
2015-08-14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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