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광화문 현판/함혜리 논설위원

[씨줄날줄] 광화문 현판/함혜리 논설위원

입력 2010-08-03 00:00
수정 2010-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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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는 조선 건국 후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긴 뒤 최고의 길지를 택해 지금의 경복궁을 지었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자 경복궁 건설 책임을 맡았던 정도전에게 모든 건물과 문의 이름을 짓도록 명했다. 정도전은 태조 4년(1395년) 10월7일 경복궁의 남쪽 정문이 정남으로 태양을 바라보고 있다 하여 정문(正門)이라 이름 붙였다. 이 문의 명칭은 세종 8년(1426년)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의 광화문(光化門)으로 바뀌었다.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불타 없어지고 고종 2년(1865년)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함께 복원됐다.

일제 강점기에 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가 6·25전쟁 때 폭격으로 목조 다락이 불에 타 없어졌다. 현판도 이때 사라졌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광화문을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 원래 자리에 세우고 박 전 대통령은 직접 한글로 ‘광화문’이라는 이름을 써 걸었다.

광화문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계속된다. 참여정부 시절 재야 사학계에서는 광화문 복원이 크게 잘못됐다고 목청을 높였다. 위치가 13.5 m 뒤로 밀렸고, 문의 방향각이 3.5도 틀렸으며, 글자순서도 우좌횡서가 아니라 좌우횡서로 그 의미를 반감시켰다고 주장했다. 문화재청은 2006년 광화문을 고종 중건기 모습으로 복원하고, 한글 현판도 교체하기로 했다. 문화재청이 사료 수집 중 다시 세워진 광화문의 현판을 경복궁 중건 공사를 총지휘한 훈련대장 임태영이 썼다는 것을 확인했다. 임태영을 광화문 현판의 서사관(書寫官)이라 표기하고 있는 공사일지 ‘경복궁 영건일기’에서였다. 일제시대 찍은 광화문 사진 등을 근거로 글씨체를 복원해 냈다.

오는 8월15일 광화문 새 현판 일반 공개를 앞두고 논란이 재점화됐다. 정부는 문화재 복원은 원형 그대로를 살리는 것인 만큼 옛 한자 현판을 거는 데는 무리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한글단체 등은 시대정신을 살려 훈민정음 글씨체로 된 현판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글의 세계화에 박차를 가해도 모자랄 판에 한자로 된 현판 제막식은 어불성설이라고 한다. 박정희바로알리기국민모임 등 20여개 단체는 광화문의 박 전 대통령 친필 한글 현판 철거가 ‘박정희대통령 흔적지우기’의 일환이라며 친필 현판을 다시 내걸 것을 요구하고 있다.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기세다. 경솔한 결정으로 이런 소모적인 논쟁을 낳게 한 장본인은 부끄러워할 줄이나 아는지 궁금하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2010-08-03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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