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형 주필
오바마 미 대통령이 부시가 26년 전 고르바초프에게 말한 것처럼 중국 시진핑 주석에게 “당신이 김정은에게 매년 기름과 식량 등 수십억 달러를 지원하니까 핵 개발을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고 하자. 시 주석은 무슨 말을 했을까. 아마도 즉답을 피하고 대신에 “당신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계속하니까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 아니냐”며 역정을 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은 북한의 이번 4차 핵실험 직후 미국의 책임론을 들먹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지난 3년간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근간으로 한 대북 정책의 틀을 개성공단 전면 중단 조치를 기점으로 ‘압박·제재’ 모드로 크게 전환했다. 16일 국회 연설에서는 “기존 방식으론 북 핵개발 의지를 못 꺾는다”고 단언하고 북한 정권을 반드시 변화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김정은 정권을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하겠다는 의지까지 번득이고 있으나 그 방법론에 관해서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채찍’ 모드에 따른 일련의 수순은 미·일의 독자 제재, 특히 북한과 거래하는 제3국의 기업이나 개인까지 제재하는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의 구체적 시행, 유엔 안보리를 통한 제재, 북한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을 ‘반인도적 범죄자’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하는 등의 방법이 가능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음달 7일부터 4월 말까지 계속될 한·미 연합 ‘키리졸브’ 군사연습과 독수리훈련이 실질적인 대북 압박이 될 수 있다. 핵,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제거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작전계획도 적용되는 이번 고강도 훈련은 수십만 북한군의 고달픈 대응 훈련을 강요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진짜 아파할 ‘채찍’을 만든다면 중국과의 연대가 필요하다. 박 대통령의 천안문 망루 외교 자산은 아직도 살아 있다고 본다. 우리가 중국과 등질 이유가 없다. 중국이 석유와 식량을 국제 가격으로 북한에 공급한다면 북한이 지금처럼 핵 개발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중국에 다시 물어야 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실전 배치하는 마당에 이미 사문화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우리가 왜 지켜야 하는가”, “북핵 위협엔 핵으로 맞서야 하는데, 미국의 전술핵을 한국으로 다시 불러들여야 하지 않겠나”, “주한 미군에 사드를 배치하더라도 북핵이 폐기된다면 나중에 철수할 것 아닌가” 등등 많은 질문이 있다.
물론 중국이 미국의 ‘아시아 회귀전략’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북한을 버리고 한국 편을 들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중국이 북한의 핵 개발을 계속 방관하는 것은 북핵 협상으로 휴전체제가 평화협정체제로 전환될 경우 미군의 한국 주둔 명분이 없어질 것이라는 노림수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국과 중국은 양국의 미래 이익 교환을 두고 머리를 맞댈 여지가 많다.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미·소 정상이 탈냉전을 선언한 후 과거 동맹국이나 위성국에 배치했던 전술핵을 철수시키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치권 일각에서 한국의 핵무장론을 펴고는 있으나 대중국 협상 지렛대로 써먹기에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중국이 북핵 때문에 동북아가 신냉전시대로 회귀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중국도 ‘북한 부담론’을 고민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중국의 심금을 때려야 한다.
2016-02-1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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