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햇살 한 뼘 담요/조성웅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햇살 한 뼘 담요/조성웅

입력 2019-01-03 17:28
수정 2019-01-04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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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 새벽
김성호 / 새벽 72.7×50㎝. 캔버스에 유채
도시 야경을 줄곧 그려 온 작가. 영남대 미술대학 및 동 대학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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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한 뼘 담요 / 조성웅

울산 용연 외국계 화학공장에 배관철거 수정 작업 나왔다

기존 배관라인을 철거하는데 먼지가 일 센티미터 이상 쌓여 있었다

변변찮은 마스크 하나 쓰고 먼지 구덩이에서 일을 하다 보면

땀과 기름때로 범벅이 된 내 생의 바닥을 만나곤 한다

마스크 자국 선명한 검은 얼굴로 정규직 직원 식당에 밥 먹으러 가면

까끌까끌한 시선이 목구멍에서 느껴졌다

기름때 묻은 내 작업복이 부끄럽지는 않았으나

점심시간 어디를 찾아봐도 고단한 몸 쉴 곳이 없었다

메마른 봄바람이 사납고 거칠었다

흡연실에서 담배 한 대 물고 버티는데

축축해진 몸에 한기가 돌았다

흡연실 쓰레기통 옆이 그런대로 사나운 바람도 막아주고

햇살 한 뼘 따뜻했다

함께 일하던 이형이 쓰레기통 곁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나더니

몸을 오그려 고개를 숙였다

이내 코고는 소리가 쓰레기통에 소복이 쌓였다

난 그의 곁에서 오래도록 아팠다

안정도 지금 그를 안내할 수 없고

행복도 지금 그를 도와줄 수 없고

코뮤니즘도 지금 그를 격려할 수 없었다

쭈그려 쪽잠 자는 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꿈조차 꾸지 못하는 그의 고단한 몸을 깨우지 않는 것이었다

햇살 한 뼘조차 그늘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난 햇살 한 뼘을 가만히 끌어다 덮어주고 싶었다

가진 것 하나 없어도

가진 것 하나 없는 맨몸으로 도달한 투명한 수평

햇살 한 뼘 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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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느낌이다.

설명을 하면 죽는다. 마음의 행간에 종이배를 띄우고 천천히 흐르자.

당신이 ‘햇살 한 뼘 담요’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멋지지 아니한가.

곽재구 시인
2019-01-04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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