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박경리/이에스더 아리랑TV 글로벌전략팀장

[글로벌 시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박경리/이에스더 아리랑TV 글로벌전략팀장

입력 2015-01-18 23:56
수정 2015-01-19 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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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스더 아리랑TV 글로벌네트워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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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 동상이 러시아에 세워진다. 2013년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푸슈킨의 동상이 서울에 세워진 것을 계기로 한국 문학의 큰 봉우리인 선생의 동상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건립하기로 한 것이다. 몇 해 전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길, 마침 2차대전 승전기념일을 맞아 궁전광장을 가득 메운 구름 같은 사람들이 ‘러시아, 러시아’를 외치며 그 물결이 넵스키 대로를 타고 끝도 없이 이어지던 광경이 떠오른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300년간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유서 깊은 도시다. 낙후한 제정 러시아를 유럽의 강력한 제국으로 만들려는 야망에 불탔던 표트르 대제는 유럽 진출의 교두보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다. 1703년 모스크바를 버리고 네바강 하구의 음침한 습지에 돌을 쌓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대제는 거침없이 몰아붙여 101개 섬이 500여개의 다리로 이어진 ‘북쪽의 베니스’를 탄생시켰다. 표트르 대제는 수많은 서유럽의 예술가들을 러시아로 초빙해 새로운 수도 건설에 참여시켰고 또 재능 있는 러시아 화가들을 서유럽으로 유학 보내면서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고전주의를 동시에 수용하며 독특한 러시아적인 혼합이 만들어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새로운 문화적 수도로 자리 잡았고 황실과 귀족의 상류층 문화는 빠르고 강렬한 유럽화를 경험하며 황금기를 꽃피운다.

도시 건설과정에서 수만명이 희생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악마의 도시’, ‘뼈 위에 세워진 도시’라고도 불렸다. 표트르 대제의 과격한 개혁 추진은 반대에 부딪혀 자신의 아들 알렉세이 황태자를 제거하는 등 많은 희생을 치렀으나 300년 후 이 아름다운 도시를 찾은 나는 한 사람의 비전이 역사를 바꾼 그 장대함에 놀라고 또 놀라니 문명의 과정은 야만적이나 문명의 결과는 아름답다고 하겠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격조 높은 예술의 향기를 풍겨 준다. 유럽의 예술가들이 파리를 동경하고 사랑하듯, 러시아의 수많은 예술가가 이 도시를 찾았고 이곳에 살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19세기부터 혁명 이전까지 상트에 살았던 예술가들의 리스트는 오페라, 연극, 문학, 미술, 발레 등 수많은 분야에서 도스토옙스키, 차이콥스키, 샤갈 등 화려한 이름이 줄을 잇는다.

러시아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 작가 푸슈킨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유럽을 향한 창’이라고 표현했다. 1799년 모스크바에서 출생한 푸슈킨은 12세 때 페테르부르크 근교 ‘차르스코예 셀로’에 있는 황립 귀족 학교에 입교하여 펜싱, 승마, 수영, 지리학, 외국어 등 근대식 교육을 받으며 러시아적인 것과 외래적인 것의 절묘한 혼합을 이루는 문학 세계를 형성한다. 서정시, 영웅시, 장편소설, 평론 등 모든 장르를 섭렵한 그는 ‘예브게니 오네긴’으로 운문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발, 19세기를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로 만들었다.

한·러 수교 25주년을 맞는 올해, 상트페테르부르크 300주년 기념공원에 박경리 선생의 동상이 세워진다. 페테르부르크 대학 교내에 건립이 논의되다가 러시아 측이 더 많은 시민이 볼 수 있게 하자며 신도심에 있는 이 공원을 제안했다고 한다. 이번 기회에 ‘토지’의 러시아어 번역도 진행되길 기대한다. 우리 민족의 한 많은 근현대사를 폭넓게 그려낸 박경리의 작품은 러시아인들에게 한국인의 삶에 대한 백과사전이 될 것이다. 양국 간 문화의 차이는 있으나 우리가 삶의 동일한 문제를 탐구하고 있음을 푸슈킨 공동체 러시아인들이 발견하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2015-01-1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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