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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경의 배회의 기술] 명랑한 하늘과 함께/작가

[김가경의 배회의 기술] 명랑한 하늘과 함께/작가

입력 2022-03-22 20:32
업데이트 2022-03-23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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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경 작가
김가경 작가
지하실 한편에 작업실을 만들게 됐다. 코로나가 심해 카페 가기도 쉽지 않아서였다.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벽면만 수성 페인트로 칠하기로 했다. 먼저 무채색을 좋아하는 남편의 의견을 받아들여 흰색 페인트로 얼룩진 생활의 때를 덮어 나갔다. 뒤늦게 아들이 의견을 내 오렌지 색상이 추가됐다. 미드(미국 드라마) 시청과 카페 투어로 익힌 색채 감각이 보태진 것이다. 삼면의 벽이 하얘질 즈음 오랫동안 자주 만나 온 그녀가 잠시 들렀다. 아직 마무리가 안 된 공백의 면을 보더니 “언니, 여긴 짙은 그린이지”라고 콕 집어 말했다. 중고마켓에서 실어다 놓은 책상과 의자 등 전체 색상을 꼼꼼하게 확인한 뒤 나온 의견이었다. 작업실을 혼자 쓸 생각만은 아니었기에, 머릿속에 오렌지색에 이어 그린색이 추가됐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색은 따로 있었다. 노란색이다. 집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그 색을 칠하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과 아들이 노란색을 좋아하지 않아서였다. 내가 이유 없이 좋아하는 것처럼 남편과 아들도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다 같이 사는 공간인지라 그들의 안정감을 위해 노랑은 속에 품는 색이 돼 버렸다. 이번에는 한 면이라도 노란색을 칠해 보리라 작정했다.

나는 마지막 한 면을 남겨 두고 페인트칠을 일단 멈추었다. 오렌지와 그린, 노랑에 대한 내 속내까지 더해 선택을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일주일가량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한 면을 방치해 놓다가 최종 결정을 하게 됐다. 나는 노란색을 스스로 포기했다. 이미 가져다 놓은 물건들이 노란색과는 잘 맞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아들이 오렌지에 대한 의욕을 꺾어 별 반감 없이 ‘그녀의 그린’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남편은 벽의 사면 중 삼면이 흰색으로 칠해진 것을 보고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더니 며칠 뒤 퇴근하며 녹색과 청색 색소를 사왔다. 흰색을 조금 섞어서 원하는 색상을 만들라고 했다. 내가 샘플로 내민 그녀의 그린은 채도를 맞춰 가며 조색을 해야 되는 색채라는 것이다. 계량을 힘들어하는 나에게 그 막중한 일을 의심 없이 맡기다니….

늦은 저녁, 지하실 한 구석에서 조색을 시작했다. 여태 감(感)으로 행해 온 수많은 일들을 떠올리며 의심 없이 과감하게 색을 섞었다. 흰색을 바탕으로! 결과는 당혹스러웠다. 누구도 거론해 본 적이 없는 색이 만들어진 것이다. 명랑한 하늘색이라고 해야 하나. 들여다보고 있는데 자꾸 마음이 설?다. 그날 밤, 남아 있는 벽면에 뜬금없이 나온 그 색을 칠한 것은 하늘이 그리워서라고 말하고 싶다.

몇 주가 지난 지금 컴컴한 지하실 통로를 지나 작업실 문을 열면 명랑한 하늘이 맨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 아래 오렌지색 의자와 짙은 녹색의 관엽식물을 놓아두었다. 나의 충동으로 인해 색에 관여한 이들이 섭섭해하지 않기를 바라며 말이다.

2022-03-23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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