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 경찰청장님, 믿어도 됩니까?/주병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경찰청장님, 믿어도 됩니까?/주병철 논설위원

입력 2012-06-20 00:00
수정 2012-06-20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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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보(尹石輔)는 연산조(燕山朝) 때 사람으로 풍기 군수가 되었는데, 처자를 고향에 두고 부임했다. 부인은 살림살이가 어려워 선대부터 내려오던 몇 가지 물건을 팔아 밭 한 뙈기를 샀다. 이 말을 들은 석보는 편지를 보내 아내를 나무랐다. “옛말에 임금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국록 이외에 탐을 내지 말라는 말인데, 내가 관직에 올라 임금의 녹을 받으면서 전에 없던 밭을 장만했다 하면 세상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겠소. 빨리 밭을 물려 버리시오.” 청렴한 벼슬아치의 결기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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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병철 논설위원
주병철 논설위원
“판중추(判中樞) 조오(趙吾)가 합천(陜川) 원(員)이 되었을 때다. 여름에 농어가 넘쳐나는데 썩어도 집안 식구에게는 조금도 맛보지 못하게 해 사람들이 그 청렴함에 탄복했다. 그가 예조정랑(禮曹政郞)이 되었을 때는 살림살이를 걱정한 동료가 쌀 세 말을 보냈는데 받지 않았다. 나중에 공좌(公座)에서 이 일을 자랑하니 흉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 청탁을 하는 이가 없었다. 늙어서 시골집에 물러나와서도 청렴하고 삼가는 독실한 군자(君子)였다.” 조선 전기 학자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나오는 얘기다.

옛날 얘기를 꺼낸 건 얼마 전 김기용 경찰청장이 경찰 내 ‘부패·비리와의 전쟁’을 선포한 게 생각나서다. 김 청장의 경찰 쇄신안은 역대 청장들이 취임 때마다 들고 나온 단골 메뉴다. 경찰이 비리 경찰 소탕에 아직도 골머리를 썩고 있다니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김 청장이 결국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김 청장이 성공하려면?

우선 김 청장은 ‘부패·비리와의 전쟁’ 선언이 앞뒤가 바뀐 점부터 깨달아야 한다.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청렴은 윗사람부터 솔선수범해야 한다. 적어도 내부 전쟁에 돌입하려면 경무관급 이상 수뇌부는 누가 보더라도 청렴의 표상이 돼야 한다. 이들의 직속 라인에 있는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면 옷을 벗겠다는 서약이라도 해야 한다. 전·현직 고위 간부가 적절치 못한 처신으로 조직에 누를 끼치고, 비리 혐의로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현실을 보면 더욱 그렇다.

전쟁을 치러야 할 대상을 ‘전국의 경찰관’으로 특정한 건 정말 위험한 발상이다. 부패·비리 근절을 위해 전국적으로 10년 이상된 경찰관을 모조리 뒤바꾸겠다는 김 청장의 호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자칫 부작용만 적잖이 초래할 수 있다. 가장 문제가 심각한 곳을 골라 본때를 보여야지,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식이 돼서는 곤란하다. 부패·비리와의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소위 ‘물 좋은’ 강남 권역으로 가지 못해 안달하는 경찰관들이 득실거리는 게 현실이다. 서울 지역 경무관·총경 승진자 중 강남지역 서장이나 과장 출신이 얼마나 되는지를 먼저 따져보라. 구조적인 문제의 출발점이 어디인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경찰 부패·비리는 ‘인사 양극화’와 직결돼 있다.

수장이 바뀔 때마다 조직을 신설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 이강덕 전 서울청장은 취임 후 실종팀을, 김용판 서울청장은 주폭팀을 신설했다. 사회적 관심에 따른 대처로 보이지만 수장의 업적이나 치적용이란 비아냥도 있다. 기존의 팀에서 인원을 차출해 새 팀을 만드는 건 윗돌을 빼서 아랫돌을 메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기왕 팀을 만든다면 근원적인 대안 찾기에 초점을 맞춰 접근해야 한다. 주폭팀을 예로 들면 술 먹고 행패 부린다고 무작정 잡아넣는 게 능사가 아니다. 이들을 둘러싼 주변 환경을 좀 더 분석해 사회적 범죄 유발을 막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다.

국세청장 대행을 지낸 한 인사는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내가 그만두고 나간 뒤에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고 판단된다면 하지 말라.” 필요한 일, 해야 할 일을 시키고 이를 앞장서 실천할 때 리더는 빛난다. ‘부패·비리와의 전쟁’은 김 청장 이후 더 이상 신임 청장의 과제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bcjoo@seoul.co.kr

2012-06-2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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