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각자의 경험 모두가 나라 자산이다/김용환 서울대 초빙교수·전 문화부 차관

[열린세상] 각자의 경험 모두가 나라 자산이다/김용환 서울대 초빙교수·전 문화부 차관

입력 2015-01-22 18:02
업데이트 2015-01-22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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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환 문화관광연구원 석좌위원
김용환 문화관광연구원 석좌위원
지금부터 25년 전의 일이다. 독일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유엔이 설립한 아시아공과대학에서 공부할 때였다. 논문 지도 교수는 일본인으로 임기를 마치고 귀국해야 했고, 혼자 남아 논문을 마무리해야 했던 필자는 좌불안석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후임 일본인 교수를 만난 일순간에 모든 걱정은 기우가 됐다. 후임 교수는 논문 진행 상황은 물론 가족관계, 출신학교, 직업, 취미까지 나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고 심지어는 논문에 꼭 필요한 SPSS, TSP 등 수백만원에 달하는 고가의 통계 프로그램을 일본에서 구입해 와서 나에게 전해 주었다. 전임자의 철저한 기록 덕분에 무사히 논문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고마움에 앞서 일본의 저력과 경쟁력이 이렇듯 치밀하고 꼼꼼한 기록 정신에서 나왔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4개월 전의 일이다. 미주개발은행(IDB)이 마련한 정책포럼에서 우리나라의 재정정보화 경험을 중남미 공무원들에게 소개할 기회가 있었다. 주최 측은 재정정보화의 필요성이나 운영효과 등 총론적 설명보다는 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과 갈등조정 등 실제 겪은 현장 경험을 듣길 원했다. 포럼을 준비하면서 정보화사업이 추진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대부분의 자료들이 재탕·삼탕의 총론 수준에 머물고 있음을 알게 됐다. 수천억원이 투입됐고 국제적인 성공 사례로 뽑히는 국책사업에 대한 경험서는 물론이거니와 제대로 된 백서조차 없었다. 필자는 운이 좋게도 재정정보화사업 초기의 실무책임자였기에 당시의 기억을 바탕으로 참석자들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었지만 제대로 된 경험 기록이 없어 영영 아쉬웠다.

우리는 기록을 중시하는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다. 모든 백성들이 쉽게 글을 읽고 기록할 수 있도록 훈민정음이 창제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난중일기, 일성록 등 11개의 기록유산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문화에 등재돼 문화대국이라는 중국을 제치고 아시아에서 첫 번째, 세계에서는 다섯 번째의 기록문화 보유국이 됐다. 우리 선조들은 기록이 창조의 원천임을 알고 이를 실행했던 것이다.

둔필승총(鈍筆勝聰)이란 말이 있다. 둔필의 기록이라도 총명한 머리보다 낫다는 경험의 지혜다. 어찌 개인에게만 해당되랴. 국가도 매한가지다. 한때 화려했던 마야, 잉카 문명이 소멸된 것도 문명을 전달할 수 있는 기록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록이 없는 문명은 지속 가능성이 없어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특히 21세기 지식정보화시대에 경험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일은 국가는 물론 개인의 생존 전략이며 미래를 열어 가는 값진 국가의 지식정보 자원이다.

우리는 지난 60년간 압축성장의 과정 속에서 앞만 보고 숨 가쁘게 달려왔다. 각종 경험들은 소중한 자산이라기보다는 쓰다 버리는 소모품 정도로 치부된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본다. 기록을 잘 하는 사람은 쫀쫀한 사람으로 낮게 평가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변했다.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자는 우매한 자라는 말도 있듯 후대의 교훈이 되고 미래발전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는 국가건 개인이건 경험을 정리하고 평가해야만 한다. 지금은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일방통행에서 벗어나 과거-현재-미래를 아우르는 숨고르기가 필요한 시기다. 세계는 우리의 개발 경험을 공유하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우리의 개발 경험이 새로운 시장이 되고 국가경쟁력이 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경험은 시간이 지날수록 잊히기 마련이고, 소중한 경험을 갖고 계신 원로들께서 유명을 달리하시는 안타까운 소식도 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부터 대한체육회를 중심으로 스포츠 역사 발굴 사업이 본격 추진된다니 여간 기쁜 소식이 아니다. 그동안 간헐적으로 스포츠 역사 발굴 사업이 추진됐지만 이번처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되는 것은 한국스포츠 100년사에서 처음이다. 체육계 원로들의 경험을 채록하고 그들의 삶을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한편 개인 소장품들을 기증받아 디지털 아카이브로 집대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여타 분야에서도 우리의 경험을 집대성하는 작업이 보다 신속히 이뤄지길 기대한다.
2015-01-2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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