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만이 알려나?”…스웨덴 연구진 세계 과학학술지 조사 ‘노킹 온 헤븐스 도어’ 살짝 변형한 생명과학논문 제목 등
반전과 평화를 노래하고, 더 나은 세상을 희구해온 미국의 전설적 포크가수 밥 딜런.세계적 권위의 의학학술지 ‘브리티시 메디컬 저널’(BMJ)은 딜런의 노래가 세계 주요 과학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 등 의학문헌 213편의 제목으로 사용됐다는 내용의 이색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 제목은 ‘자유분방한((Freewheelin’) 과학자들 : 생체의학 문헌에 밥 딜런 인용하기’다.
스웨덴의 명문 의과대학 겸 연구기관인 카롤린스카연구소(KI)의 연구진이 발표한 이 논문 제목에 쓰인 단어 ‘프리휠링’(Freewheelin’) 역시 딜런의 2집 앨범 제목으로 사용된 것이다.
16일 이 논문에 따르면, 딜런의 노래 중 가장 많이 차용된 노래는 ‘더 타임스 데이 아 어 체인징’(The Times They Are a-Changin‘)이다. 무려 135개 의학 학술문헌 제목에 차용됐다.
2위는 36개 문헌에 사용된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다.
발표자 국적은 미국이 가장 많았고 스웨덴이 그 뒤를 이었다. 대부분 미국과 유럽 과학자들이었다.
딜런 노래 제목이 의학 논문 제목에 처음 사용된 것은 1970년이다. 딜런의 데뷔 앨범이 나온 지 불과 8년 뒤 미국 임상간호학회지에 실린 논문에서였다.
딜런의 전성기였던 1970년대에 드문드문 사례가 이어지다 1990년대부터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자연과학자들이 딜런의 노래를 이토록 자주 차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구진은 우선 과학자 중에도 팬이 많고, 이 ‘시대를 읊는 음유시인’의 철학적 가사가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서일 것으로 설명했다.
딜런이 의사를 존경했고 의학자들도 ‘화답하듯’ 좋아한 것 아니냐는 농담도 곁들였다.
1980년대 초반에 발표한 ‘돈 폴 어파트 온 미 투나잇’(Don’t Fall Apart on me Tonight)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바라기를 내가 의사가 되었더라면 / 목숨을 잃은 사람들 가운데 / 일부의 생명을 구했을 텐데 / 이 세상에서 좋은 일도 좀 했을 텐데 / 내가 건넌 다리들을 불태우는 것 같은 일을 하는 대신...”
1960~1970년대에 그의 노래를 즐겨 듣던 급진적이고 자유분방한 대학생들이 1990년대부터 대거 의사나 과학자, 학술지 편집진이 됐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또 이 무렵부터 과학논문 발표나 국제학술지 발행이 급증했다.
그럼에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는 것이 저자들의 고백이다. 이들은 앞으로 아바와 비틀스 등의 사례도 조사하는 등 추가 연구를 해볼 것이라고 밝혔다.
그래도 어쩌면 딜런의 노래 가사처럼 ‘바람만이 그 답을 알지도’ 모른다.
저자들의 소개로는, 밥 딜런 노래는 주로 원 제목 그대로 또는 살짝 변형된 채 삽입됐다.
예컨대 ‘라이크 어 롤링 스톤’(Like a rolling stone)은 한 생명과학 분야 논문에서 ‘구르는 히스톤 단백질처럼’(Like a rolling histone)으로 재미있게 비틀어 사용됐다.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는 아라비도프시스 꽃가루 조기 편광화 생체 이미지와 관련된 논문 제목에서 ‘꽃가루의 문 두드리기’(Knockin’ on pollen’s door) 식으로 살짝 변형됐다.
1975년 발표한 앨범 제목 ‘블러드 온 더 트랙스’(Blood on the tracks)와 여기에 실린 곡 ‘심플 트위스트 오브 페이트’(Simple Twist of Fate)는 ‘골수세포에서 나온 뉴론(신경세포)들의 세대 : 궤도 위의 혈액, 운명의 단순한 뒤틀림?’이라는 제목의 뉴론 연구 논문에 뒤섞여 사용됐다.
‘화상(火傷)’학회지는 시대의 변화와 관련된 편집인 글에서 제목 뿐 아니라 내용 곳곳에 딜런의 노래를 그대로 인용하거나 패러디해 삽입하기도 했다.
저자들이 이번 논문을 쓰게 된 계기는 지난해 일어난 한 ‘사건’에서 비롯됐지만, 그 단초는 거의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KI의 과학자 욘 룬드버그와 에디 바이츠베르그는 1997년 과학학술지 네이처에 ‘질소산화물과 염증: 대답은 부는 바람 속에’(Nitric Oxide and Inflammation: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라는 제목의 논문을 실었다.
당시 호흡기관과 내장 속 질소산화물 측정과 관련한 공동 연구를 한 두 사람은 모두 딜런 팬이었으며 논문 제목에도 딱 들어맞는다고 여겨 그의 히트송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를 차용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을 포함해 딜런의 팬인 KI 과학자 5명이 내기를 했다. 정년 전까지 주요 학술지에 발표하는 논문이나 리뷰, 책 소개 등의 제목에 밥 딜런 노래를 가장 많이 쓰는 사람에게 점심을 사주기로 한 것이다.
17년 동안 진행된 이 내기는 지난해 옌스 야콥이 은퇴하며 우승자가 되면서 끝났다. 5명은 동네 식당에서 ’우승 턱‘인 점심을 함께 들었다.
때마침 KI 도서관 사서 카를 예르니츠키는 이 연구소 과학자 두 명이 쓴 공동 논문 제목이 밥 딜런의 노래에서 따온 듯하다는 생각을 했다.
논문 제목은 ’비(非)신경세포의 뉴론 생성 능력 : 궤도 위의 혈액. 운명의 단순한 비틀기?‘였다. 이들과 접촉해보니 ’17년 내기 참여자들‘이었고 실제 밥 딜런 노래 제목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 사연이 KI 회보에 실리고 이어 지역 신문 등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예르니츠키는 이를 계기로 KI 외의 세계의 과학자들도 밥 딜런을 논문 제목에 인용했는지 궁금해졌다. 곧 연구소 교수 및 동료 통계학자와 함께 조사에 착수했다.
밥 딜런 홈페이지(bobdylan.com)에서 딜런의 노래와 앨범 제목을 내려받아 세계 최대 의학문헌 소장처인 미국 보건부 산하 국립의학도서관의 온라인 검색도구 ’메들라인(MEDLINE)'을 이용했다.
노래 제목 일부가 포함된 문헌은 모두 727편이었으며 이 가운데 명백하게 밥 딜런 노래 차용으로 판정한 것은 213편이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