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넘버 달성’ 힐러리, 8년 재수 끝 최초 女 대통령 자리 넘보다

‘매직넘버 달성’ 힐러리, 8년 재수 끝 최초 女 대통령 자리 넘보다

이슬기 기자
입력 2016-06-07 16:03
업데이트 2016-06-07 16:03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이미지 확대
‘주민들과 함께 한 컷’
‘주민들과 함께 한 컷’ 6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컴튼의 주민회관을 방문한 민주당의 사실상 대선 후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가운데)이 주민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민주당의 캘리포니아주 경선은 7일 실시될 예정이다.
연합뉴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6일(현지시간) 미국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됐다.

퍼스트레이디에 이어 연방 상원의원, 국무장관까지 거치며 미국의 대표적 여성 정치인으로 자리잡은 클린턴 전 장관은 이제 8년간의 재수 끝에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자리를 넘보게 됐다.

◇ 학창시절부터 정치의 꿈 키운 ‘준비된 후보’

AP통신 등 미국 언론들의 자체 집계를 기준으로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에 필요한 전체 대의원 과반인 2천383명을 확보해 본선행을 사실상 확정지은 클린턴은 한마디로 ‘준비된 후보’다.

퍼스트 레이디에 상원의원, 국무장관, 그리고 비록 패했지만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까지 경험한 클린턴은 민주당 대선 후보로서 손색이 없는 프로필을 갖췄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클린턴은 1947년 10월26일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 근교에서 섬유업계 사장 출신으로 영국 웨일스 혈통인 아버지 휴 앨즈워스 로댐과 전업주부인 도로시 하월 로댐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독교를 믿는 보수적 가정에서 성장한 클린턴은 어려서부터 활달했고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고교 때에는 학급회장, 토론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도 사회과학 부분 최우수상을 받은 우등생이었다.

클린턴이 애초부터 민주당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다. 16세 때 고교생으로서 ‘신보수주의 운동’의 기수였던 공화당 대통령 후보 베리 골드워터의 선거캠프에서 일했고 명문여대인 웰즐리 대학에 진학한 이후에는 정치학과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공화주의자 클럽’ 동아리를 이끌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60년대 말부터 미국 전역에 불어닥친 민권운동 열풍 속에 민주당원으로 돌아섰다. 특히 1968년의 마틴 루서 킹 목사 암살 사건과 베트남 전쟁이 정치 지향을 바꾼 계기가 됐다.

웰즐리 대학 졸업식 때 학생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졸업연설을 했을 뿐만 아니라 연설 후 7분여 동안이나 기립박수를 받은 것이 화제가 돼 라이프지에 소개된 적이 있다. 이 대학 행정대 회장이었던 클린턴은 동기 여학생들을 향해 “아직은 아니지만 우리가 지도력과 힘을 발휘할 시대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외쳤다.

1969년 예일대 로스쿨에 진학한 클린턴은 예일 리뷰 편집인을 맡고 저소득층 자녀를 위한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이때 한 살 많은 아칸소 주 출신 법학도인 남편인 빌을 만났고 이는 클린턴의 인생 항로를 결정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됐다.

이후 월터 먼데일 당시 상원의원의 이민노동자 소위원회에서 일하면서 이민과 보건, 교육문제를 다뤘고 빌과 함께 하원 법사위의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 탄핵준비팀으로도 활동하기도 했다.

빌과 결혼한 것은 1975년 10월. 아칸소주 리틀 록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민 클린턴은 남편 빌이 아칸소주 법무장관을 거쳐 1978년 주지사에 당선되는 등 정치인으로 날개를 펴는 동안 로즈 법률법인의 변호사로 일하며 법조인으로서의 길을 걸었다.

빌이 1982년 주지사에 재선된 이후 클린턴은 로즈 법률법인 파트너로 활약하면서도 연방정부기관인 아칸소주 교육기준위원장, 농촌보건자문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 영향력 있는 100대 변호사로 선정되기도 했다.

◇ ‘일하는 퍼스트레이디’-상원의원-국무장관 경험

빌이 1992년 4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은 클린턴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됐다. 빌은 당시 자신보다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클린턴을 의식해 자신을 찍으면 ‘하나 가격에 둘을 사는 셈’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빌러리’(빌+힐러리)라는 말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백악관에서의 8년은 ‘일하는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삶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 이후 가장 영향력있는 영부인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력을 과시했다. 특히 국가보건개혁 테스크포스를 이끌면서 완성한 보건 계획은 ‘힐러리케어’(Hillarycare)로도 불렸다. 지금의 오바마케어의 모태이기도 하다.

남편의 첫 임기 때 아칸소 주 화이트워터 지역 부동산 개발 사기 사건과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화이트워터 사건’, 두 번째 임기 때 터진 ‘르윈스키 스캔들’과 이후 탄핵 파문은 클린턴에게 커다란 시련이었지만, 오히려 ‘정치인 힐러리’로 변신하는 동력이 됐다.

민주당의 권유를 받아들여 2001∼2009년 상원의원(뉴욕주)을 지낸 것은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를 새롭게 구축하는 기회였다. 당파를 초월해 의원들과의 폭넓은 교류를 하고 전국을 돌며 유권자들을 만나는 ‘듣는 유세’(listening tour)를 펼친 것이 유명하다. 다만 2002년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군사작전을 승인한 상원 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진 것은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2003년 출간한 회고록 ‘살아있는 역사’에서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걷고 있다고 밝힌 클린턴이 대통령의 꿈을 드러낸 것은 2007년 1월이었다.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이후 선거운동 초반만 해도 대세론을 탈 정도로 지지율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그러나 2008년 1월 아이오와 첫 경선에서 정치 신인 버락 오바마 후보에게 패하면서 날개가 꺾였고, 그해 6월 선거운동을 중단하고 오바마 지지를 선언했다.

2009년 오바마 1기 행정부 출범 이후 국무장관직을 맡은 것은 대선 주자로서의 ‘내공’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때 외교사령탑으로서 시시각각 전개되는 국제현안에 대처하고 상황실에서 국가안보에 관한 중요사항을 결정하는 경험을 가졌다.

2013년 2월 국무장관 직에서 물러나 대선을 물밑 준비해온 클린턴은 지난해 4월12일 마침내 대권 재도전을 선언했고, 1년여 만에 버니 샌더스의 ‘아웃사이더 돌풍’을 잠재우며 미국 역사상 최초의 주요 정당의 여성 대선후보가 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많이 본 뉴스
공무원 인기 시들해진 까닭은? 
한때 ‘신의 직장’이라는 말까지 나왔던 공무원의 인기가 식어가고 있습니다. 올해 9급 공채 경쟁률은 21.8대1로 32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공무원 인기가 하락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낮은 임금
경직된 조직 문화
민원인 횡포
높은 업무 강도
미흡한 성과 보상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