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난민·베개 난민·막차 난민… ‘난민 쇄국’ 日의 도 넘은 희화화

점심 난민·베개 난민·막차 난민… ‘난민 쇄국’ 日의 도 넘은 희화화

김태균 기자
입력 2020-11-04 22:24
업데이트 2020-11-05 02:52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월드 Zoom in] ‘난민’ 관련 마구잡이식 신조어 남발

초고령사회 상징 ‘쇼핑 난민’ 등 넘어
‘미용액 난민’ 문구 보습제 광고에 이용
“절박한 난민들 의미·무게 희석” 비판

이미지 확대
지난해 12월 일본의 주요 전철역과 전동차 내부 등에 걸렸다가 비판을 받고 철거됐던 한 화장품 회사의 ‘일본의 미용액 난민에게’ 광고. 출처 트위터
지난해 12월 일본의 주요 전철역과 전동차 내부 등에 걸렸다가 비판을 받고 철거됐던 한 화장품 회사의 ‘일본의 미용액 난민에게’ 광고.
출처 트위터
지난해 12월 일본 도쿄에 본사를 둔 한 화장품 회사는 주요 전철역 등에 ‘일본의 미용액 난민에게’라는 문구의 보습제 광고를 내걸었다가 혼쭐이 났다. 회사 측은 “자신에게 맞는 보습제를 찾지 못한 여성들의 고민을 해결해 준다는 뜻”이라고 설명했지만, ‘난민’이라는 인권 차원의 용어를 멋대로 갖다 붙였다는 비난이 쇄도했고 결국 광고는 10여일 만에 철거됐다.

일본 사회에 ‘난민’을 합성한 신조어가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 난민’ 표현은 연관성 있는 사회현상을 하나의 시리즈로 묶어 표현하기 좋아하는 일본적 분위기의 산물이다.

일본에서도 원래 ‘난민’이 아무 데나 붙지는 않았다. 생활에 어려움이 큰 계층에 한정돼 쓰이는 경향이 강했다. 대표적인 것이 초고령사회의 상징인 ‘쇼핑 난민’이다. 지방의 인구 감소로 생활권 주변 상가·상점이 사라지고 대중교통 노선까지 끊기면서 식료품 등 생활필수품 구매에 어려움을 겪는 고령자들을 뜻한다. 이와 비슷한 고령화의 그늘로 ‘쓰레기 배출 난민’이 있다. 쇠약해진 기력에 혼자 힘으로는 쓰레기를 내다 버리지 못해 집안에 쌓아 놓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살아가는 고령자들을 지칭한다.

짝을 못 만나 결혼하지 못하는 ‘결혼 난민’, 아기를 갖지 못하는 ‘출산 난민’, 취업에 계속 실패하는 ‘취직 난민’ 등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다지 심각한 상황이 아닌데도 마구잡이로 난민이 붙여지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점심식사 장소가 마땅치 않아 고민인 ‘점심 난민’, 실내흡연 금지 이후 담배 피울 공간이 아쉬운 ‘흡연실 난민’, 영어를 잘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 ‘영어 난민’, 대중교통 막차를 놓친 ‘막차 난민’과 같은 것들이다. ‘기가 난민’(휴대전화 데이터 용량이 부족한 사람들), ‘턱 난민’(턱관절 장애를 앓는 사람들), ‘베개 난민’(자신에게 맞는 베개 등 침구가 필요한 사람들) 등은 미용액 난민과 같이 상업적 의도로 생겨난 말들이다.

그러나 민족, 종교, 정치·사상 등의 차이로 생명을 위협받는 절박한 사람들을 뜻하는 이 말이 남발되면서 일본 사회 내 의미와 무게를 희석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일본이 난민 수용에 가장 폐쇄적인 국가라는 점에서도 용어 남발은 자제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4일 일본 법무성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정부는 총 1만 375명의 난민 신청자 중 0.4%인 43명만 인정했다. 2018년 기준 독일 5만 6500명(인정률 23%), 미국 3만 5200명(35%) 등에 비해 턱없이 낮다.

난민 문제에 정통한 하시모토 나오코 히토쓰바시대 교수는 “다양한 난민 신조어들은 실제 곤경에 처해 있는 난민들의 처지와 심경을 희화화하고 조롱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서 “난민이라는 말의 원뜻을 제대로 파악해 그들이 처한 상황을 깊이 헤아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2020-11-05 18면
많이 본 뉴스
국민연금 개혁, 당신의 생각은?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연금 개혁과 관련해 ‘보험료율 13%·소득대체율 44%’를 담은 ‘모수개혁’부터 처리하자는 입장을, 국민의힘은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각종 특수직역연금을 통합하는 등 연금 구조를 바꾸는 ‘구조개혁’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며 맞서고 있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모수개혁이 우선이다
구조개혁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
모르겠다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