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편지 아내에게 쓴 것 아냐” 새 주장
1873년 실각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1882년 임오군란으로 재집권하는가 싶었지만 친청파인 명성황후의 역습으로 그해 청나라에 납치됐다. 유폐된 톈진(天津)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흥선대원군은 1882년 정치적 라이벌인 명성황후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한글 편지를 보낸다.“그동안 망극한 일을 어찌 만 리 밖 책상 앞에서 쓰는 간단한 글월로 말하겠습니까. (중략) 다시 뵙지도 못하고 (내가 살아 있을) 세상이 오래지 아니하겠으니 지필을 대하여 한심합니다. 내내 태평히 지내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이종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27일 “흥선대원군이 편지봉투에 ‘뎐 마누라 젼(前)’이라고 써 놓은 편지가 그의 부인 민씨가 아니라 며느리인 명성황후에게 보낸 편지였다.”고 ‘조선시대 한글편지 공개 강독회’에서 주장했다. 이는 1973년 11월 문학사상 14호에서 정양완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마누라’를 아내로 해석한 기초를 부정한 것이다.
이 연구원은 “‘뎐 마누라 젼’의 ‘뎐’은 대궐 전(殿) 자이며 ‘마누라’는 지체 높은 사람의 부인을 높여 부를 때 사용된 말”이라며 “(순조 임금의 딸 덕온공주의 손녀인) 윤백영 여사의 글에도 ‘뎐 마누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중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했다. 그는 “편지의 사연으로 보아도 대원군의 부인이 될 수가 없다.”고 덧붙였다. ‘마마께서는 하늘이 도우셔서 환위(還位)를 하셨거니와 나야 어찌 생환하기를 바라오리까.’라는 편지 내용에서 ‘환위’는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지방으로 피신했다가 왕궁으로 돌아온 일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이 이 연구원의 설명이다. 이 연구원은 “또한 안부를 물을 때는 임금의 안부를 먼저 묻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편지에서 흥선대원군은 아들인 고종의 안부보다 실권자인 명성황후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면서 “당시 상황이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랬겠느냐.”고 말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2012-06-28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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