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묘한 편견 옥죄어 와도, 여성은 이제 지지 않는다

교묘한 편견 옥죄어 와도, 여성은 이제 지지 않는다

이슬기 기자
입력 2020-06-18 17:52
업데이트 2020-06-19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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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호스/강화길 지음/문학동네/300쪽/1만 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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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길 작가의 신작 소설집 ‘화이트 호스’를 두고 출판사는 ‘세상을 자신만의 의미로 다시 쓰려는 여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누군가는 영영 알지 못할 이야기’라고 썼다. 그의 소설을 두고 ‘고딕 스릴러’라 함은 앎과 모름의 낙차가 주는 긴장감 때문인 듯하다. 문학동네 제공
강화길 작가의 신작 소설집 ‘화이트 호스’를 두고 출판사는 ‘세상을 자신만의 의미로 다시 쓰려는 여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누군가는 영영 알지 못할 이야기’라고 썼다. 그의 소설을 두고 ‘고딕 스릴러’라 함은 앎과 모름의 낙차가 주는 긴장감 때문인 듯하다.
문학동네 제공
대상화되지 않고 주체적인 여성들
가족·친척·시가 속 미묘한 갈등에도
스스로 삶 선물하려 가시밭길 선택


‘달려라 아비’를 쓴 김애란 작가는 “소설이 주는 위로란 따뜻함이 아니라 정확함에서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 말에서 힌트를 얻자면, 강화길의 소설은 막힌 혈을 뚫는 바늘 같은 존재다. 그의 여성 서사는 일방향적이지 않고 다층적이며, 그의 소설 속 여성은 대상화되지 않고 주체적이다. 그의 두 번째 소설집 ‘화이트 호스’는 바늘 같은 정확함이 주는 위로의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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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호스’ 속 여성 인물들은 더이상 모르고 당하지 않는다. 다 알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처하는 사람들이다. 생존을 위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속속들이 파악해 한결 넓어진 이들의 시야에는 여성의 신체에 가해지는 위협뿐 아니라 소문과 험담, 부당한 인식과 관습 등이 포착된다. 그 교묘한 실상을 파악하는 과정에서부터 소설 전반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지만, 본 게임은 지금부터다. 알기 전엔 약자였으되 알고 나서는 더이상 약자가 아닌 여성이 벌이는 자기 주도적인 행동들. 여기서부터가 강화길 소설이 주는 숨막히는 서스펜스다.

‘화이트 호스’의 포문을 여는 ‘음복’은 올해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이다. ‘나’는 새댁으로서 처음 참석한 시가 제사에서 무례한 언사를 쏘아붙이는 시고모와 맞닥뜨린다. “아기 말이야, 아기. 안 낳아?”(12쪽)라며 대뜸 쏘아붙이는 어느 집안에나 있는 악역 같은 사람. 그러나 자신의 친정에서 벌어지는 외삼촌과 엄마 사이, 미묘한 갈등 관계 등을 떠올리던 ‘나’는 거듭되는 고모의 공격에도 속 편한 자신의 남편 정우가 이 집의 진정한 악역임을 깨닫게 된다.

‘가원佳圓’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느닷없이 사라진 할머니를 찾기 위해 살아생전 할아버지의 기억을 소환하는 ‘나’. 무능력하지만 사람 좋았던 할아버지와 생활력 좋지만 그악스러웠던 할머니의 이야기는 대를 건너뛸 것도 없이 흔한 우리네 엄마·아빠 서사다. 악역을 자처한 할머니 또는 엄마 때문에 우리의 오늘이 있음을 이제는 알지만 ‘왜 어째서. 그 무책임한 남자를 미워하는 것이, 이 미련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힘든 것일까.’(73쪽)

이어지는 소설 ‘손’이 만드는 풍경은 그로테스크하지만 손에 닿을 듯 가깝다. 남편의 해외 파견으로 딸 하나 데리고 시어머니가 있는 시골 마을에 전근 온 초등학교 교사는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자신과 딸을 수성하려고 한다. 시어머니와 마을 이장과 ‘연자네’라 불리는 아주머니 사이의 미묘한 삼각관계, 이들의 손자들을 둘러싸고 재생산되는 권력관계를 감지한 ‘나’는 편집증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그의 행동이 과한가 싶으면서도 이해되는 까닭은 비슷한 위험에 우리 모두가 노출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서우’와 ‘오물자의 출현’, ‘화이트 호스’에서 느끼는 감정도 매한가지다.

책의 끝을 장식하는 작품 ‘카밀라’에 나오는 언설처럼 “삶이란, 누군가에게 선물받을 수 있는 그런 게 아니”(244쪽)다. 그런 점에서 ‘화이트 호스’는 삶을 스스로에게 선물하기 위해 분투하는 여자들의 얘기다. 그렇다면 삶을 선물받은 ‘음복’ 속 남편 같은 이의 삶은 행복한가.

기꺼이 내가 만드는 가시밭길을 택하겠다는 여자들을 보면서 책 제목 ‘화이트 호스’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2020-06-19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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