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끝까지 살아 있는 그림, 진화론을 불러냈다

털끝까지 살아 있는 그림, 진화론을 불러냈다

유용하 기자
유용하 기자
입력 2024-02-16 01:21
업데이트 2024-02-16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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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찾아서
토니 라이스 지음/함현주 옮김
글항아리/412쪽/2만 8000원

대영박물관 시작은 동식물 표본
대항해 시대 자연사 화가의 그림
상상을 현실로 만든 생생한 기록
저자와 함께 1만점 작품 속 탐험
예술·과학 넘나들며 친근감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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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슬론 경의 방대한 자연사(natural history) 컬렉션은 대영박물관 설립의 실마리가 됐다. 슬론 경의 컬렉션은 1881년 런던 자연사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옮겨졌다. ①런던 자연사박물관을 설계한 앨프리드 워터하우스가 자연사박물관 전경을 그린 수채화. ②찰스 다윈이 우루과이 말도나도에서 선인장을 먹는 새를 발견하고 ‘타나그라 다위니’로 이름 붙였는데 현재는 ‘청황색풍금조’로 불린다. 다윈의 조류에 관한 관심은 갈라파고스의 핀치새 연구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 ‘비글호 항해의 동물학’에 삽입된 그림. ③찰스 다윈이 갈라파고스 탐험 때 탔던 비글호의 설계도. ④이국적 특성과 화려함의 전형을 보여 주는 인도공작 수컷. 스리랑카와 인도에서 자생한다.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화려하게 진화했다. 화려한 깃털은 꽁지깃이 아닌 위꼬리 덮깃이다. 18세기 네덜란드 자연사 화가 페테르 드 베베러의 그림. ⑤1872년 12월 초 챌린저호에 승선한 영국 왕립학회 소속 과학계 고위 인사들과 챌린저호 탐사에 참여한 과학자들. 당시 사진 기술로는 촬영을 위해 긴 노출 시간이 필요했는데 일부 과학자들이 이를 참지 못해 움직이다 보니 초점이 흔들린 사람들도 보인다. 영국 런던 자연사박물관·국립해양박물관·글항아리 제공
한스 슬론 경의 방대한 자연사(natural history) 컬렉션은 대영박물관 설립의 실마리가 됐다. 슬론 경의 컬렉션은 1881년 런던 자연사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옮겨졌다. ①런던 자연사박물관을 설계한 앨프리드 워터하우스가 자연사박물관 전경을 그린 수채화. ②찰스 다윈이 우루과이 말도나도에서 선인장을 먹는 새를 발견하고 ‘타나그라 다위니’로 이름 붙였는데 현재는 ‘청황색풍금조’로 불린다. 다윈의 조류에 관한 관심은 갈라파고스의 핀치새 연구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 ‘비글호 항해의 동물학’에 삽입된 그림. ③찰스 다윈이 갈라파고스 탐험 때 탔던 비글호의 설계도. ④이국적 특성과 화려함의 전형을 보여 주는 인도공작 수컷. 스리랑카와 인도에서 자생한다.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화려하게 진화했다. 화려한 깃털은 꽁지깃이 아닌 위꼬리 덮깃이다. 18세기 네덜란드 자연사 화가 페테르 드 베베러의 그림. ⑤1872년 12월 초 챌린저호에 승선한 영국 왕립학회 소속 과학계 고위 인사들과 챌린저호 탐사에 참여한 과학자들. 당시 사진 기술로는 촬영을 위해 긴 노출 시간이 필요했는데 일부 과학자들이 이를 참지 못해 움직이다 보니 초점이 흔들린 사람들도 보인다.
영국 런던 자연사박물관·국립해양박물관·글항아리 제공
밸런타인 데이에 주고받았던 밀크 초콜릿은 17세기 영국 런던의 젊은 ‘명의’ 한스 슬론이 처음 발명했다. 슬론은 젊은 시절 자메이카 총독 주치의 자격으로 신대륙에 발을 내디뎠을 때 원주민들이 카카오 열매로 만든 음료를 마시는 것을 봤다. 슬론은 그 음료에 우유를 섞으면 맛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레시피를 만들어 특허출원해 거부가 됐다. 슬론은 엄청난 재산을 바탕으로 가죽 표지로 된 265권의 식물 표본집, 1만 2500개의 식물 표본, 3000점이 넘는 척추동물 표본을 남긴다. 슬론 사후 그의 방대한 표본을 보관하기 위해 설립된 곳이 바로 ‘대영박물관’이다.

29세 스웨덴 박물학자도 슬론의 컬렉션에 대한 소문을 듣고 76세의 슬론을 방문했다. 컬렉션의 방대함에는 감동했지만 정리 방식에 크게 실망해 공개 비판하며 새로운 분류체계를 구축했다. 이 젊은 학자가 바로 생물책 속 ‘종·속·과·목·강·문·계’ 분류체계를 만든 ‘현대 식물학·분류학의 아버지’ 칼 폰 린네다.

15~16세기 대항해 시대에 많은 탐험가가 새로운 교역로와 신대륙 개척에 나섰다. 그렇지만 유럽인들에게 미지의 땅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를 제대로 알린 사람들은 황금에 눈먼 탐험가가 아닌 박물학자와 자연을 생생하게 기록한 자연사 화가들이었다.

요즘은 동식물을 연구하는 사람을 생물학자라고 부른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자연사(natural history)를 연구한다고 해서 ‘박물학자’(博物學者)라고 불렀다. 현대 생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연구하지만 박물학자들은 현장에 나가 관측과 관찰로 자연을 연구한다.

박물학의 전성시대는 17~20세기 초까지 300여년이다. 이들은 서구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던 동식물을 열정적으로 채집하고 기록하면서 박물학 자료들을 어마어마하게 수집했다. 찰스 다윈이나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헨리 월터 베이츠 같은 학자들이 ‘자연 선택’이라는 개념을 통해 진화론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도 선배들의 항해 기록과 자연사 그림 덕분이었다.

실제로 저마다의 테라 인코그니타를 개척하려는 열정을 가진 박물학자와 자연사 화가들의 노력으로 분류학과 진화론뿐만 아니라 유전학, 대륙 이동설 등 여러 과학 이론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영국 런던 자연사박물관 갑각류 큐레이터 출신인 저자는 런던 자연사박물관 내 8000만점의 소장품, 50만점의 미술품, 100만권의 장서 가운데 엄선한 작품들을 실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자료들도 포함돼 있어 책을 읽다 보면 어느덧 미지의 세계, 어느 밀림 속을 탐험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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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의 발전은 기록 방식도 진화하게 한다. 지금은 전자현미경으로 나비 날개에 있는 작은 가루(인분)를 촬영하는가 하면 초당 100번의 날갯짓을 한다는 벌새를 초고속 정지 사진으로도 찍는다. 그렇지만 20세기 이전까지는 자연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렸다. 사실 자연과학에서 ‘기록’이란 대상을 얼마나 자연 상태 그대로 구현하는가에 그 핵심이 있다. 근대 박물학자들의 기록과 그림이 과학사적 가치는 물론 예술적 가치까지 높이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고 아직도 동식물 일러스트레이터가 식물학, 동물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표본 상태가 완전치 못하더라도 그대로 찍을 수밖에 없는 사진가와 달리, 화가는 그런 상황에도 종이 위에서 조각조각을 결합해 완벽한 표본을 창조할 수 있다.”

지나친 세분화로 대중과 과학이 점점 멀어지고 있는 요즘 이 책은 창조성과 상상력, 관찰력이야말로 과학의 진짜 참모습임을 보여 주며 과학에 친근감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유용하 기자
2024-02-1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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