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삶 그의 꿈] 개발도상국 인재들을 친구로 만들 수 있다면

[그의 삶 그의 꿈] 개발도상국 인재들을 친구로 만들 수 있다면

입력 2011-01-09 00:00
수정 2011-01-09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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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에 전재산 기부한 이순자 숙명여대 명예교수

산다는 것

“우리 세대는 정말로 근검절약 했어요. 너무 어렵게 살았잖아요. 그런 생활이 몸에 배어서 오히려 어려운 줄 몰랐어요. 저축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요.”

기억만 떠올려도 너무 아픈 일이지만 1983년 북한의 아웅산 폭탄 테러로 순직하신 김재익 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의 부인인 이순자 숙명여대 명예교수. 하얗게 센 머리칼과 세상의 명리로부터 다 떠난 듯한 온화하고 잔잔한 미소가 오랜 삶의 여정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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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생전 뜻을 이어가자는 단순한 생각이 전부였어요.”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자신이 일생 아끼고 아껴서 모은 20억 원을 서울대에 아낌없이 기부하신 분. 스스로 교육자로 사셨지만 마지막까지 삶으로 이를 실천하셨다. 의도하지는 않으셨을 게 분명하지만 삶의 정리는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는 교훈을 남기셨다. 우리 시대는 어떠한가. 상호부정과 대립으로 바람 잘 날이 없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새는 그 어느 때보다 아득하게 멀어져 있다. 회복에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삶의 자세를 반성해야 한다. 이분의 간곡한 말씀이다.

“남편을 만난 것은 행운입니다. 행복합니다. 제가 아는 한 남편은 세상에서 가장 바르고 선한 사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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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묻어둔 슬픔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슬픔이 사라진 게 아니라, 사람의 운명을 긍정하시는 거다. 그런 눈빛이 느껴진다. 하지만 안타깝다. 많은 이들이 지금도 안타까워 한다. 그분이 좀 더 계셨더라면 우리 세상은 분명 달라졌을 거라고.

“이념이나 신념이 굉장히 소박했어요. 남편의 신념은 그런 것이었지만 정말 일관된 것이기도 했지요. 지상의 어느 나라라도 빈곤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 자원빈국인 우리나라가 우수한 인력자원으로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나라의 지정학적인 위치가 주변 국가들과의 돈독한 평화와 협력의 상생관계를 이루어야 안보가 확고해지고 경제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 골자였어요. 그러기 위해서 자유시장 경제체제에 입각한 개방 경제의 중요성을 아주 크게 보았지요.”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인해 당신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지 못했다. 모든 생은 중도에서 끝나는 거라 했지만, 우리나라는 아주 중대한 손실을 입은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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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익 펠로십 펀드’ 조성

“제가 기부한 걸 두고 아는 이들 중 어떤 분들이 이렇게 물어요. 자제분들과 상의한 후에 결정하신 거냐고. 그런 일 없었다고 대답하면 그분들의 눈빛이 ‘그럴 리가!’ 라는 의문을 담아요. 정말인데……. 기부한 걸 안 아들아이가 전화해서, 어머니 덕분에 우리도 떴어요. 그래서 같이 웃었던 적이 있어요.”

이게 우리 사회다. 이게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의식의 단면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식에게 물려줄 게 재산은 아닌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분. 아이들이 제 밥벌이 할 수 있을 때까지 성의껏 도와주었고, 제 살 집들 장만할 때 조금 보탠 것으로 부모의 의무를 다했다는 분. 그리고 이제 가진 것을 다 사회로 되돌려 주었다. 보도가 사실이라면 살고 있는 한 채 집마저도 나중에 기부를 약속하셨단다. 떠날 땐 집 짊어지고 가는 것도 아니라면서, 남편의 소망과 의지가 담긴 교육 장학 사업으로.

기부금을 받은 서울대는 ‘김재익 펠로십 펀드’를 조성해 개발도상국의 학생들과 공무원들에게 서울대에서 경제 정책을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2010년 11월에 서울대로 보낸, 김재익의 유가족을 대표해서 기부 의도를 밝힌 이분의 편지는 가슴을 아리게 하고 뭉클한 감동에 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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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인생의 마무리 단계에서 주변 정리를 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을 나는 겸허히 받아들인다. 남편을 불의에 잃고 혼자 두 아이를 키워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자랑스러운 남편의 음덕과 그가 이루어 놓은 경제 발전의 혜택으로 일만 하고 그 과실은 전혀 누리지 못했던 그에 비하면 그의 가족인 우리는 그에게 미안할 정도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의 신념을 담아 발족되는 이 장학금이 반세기 전 그가 젊은 시절 받았던 값진 혜택같이 개발도상에서 노력하는 젊은이들에게 배움의 목마름을 채워주고 자신의 나라를 좀 더 나은 나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애국심을 격려할 수 있다면 그의 착한 영혼이 크게 기뻐할 것이다. 우리 가족의 이 소박한 시작이 개방경제와 민주주의의 씨앗으로 넓은 세상에 전파되기를 희망하는 많은 사람들의 동참이 있다면 더욱 더 값진 일일 것이다.

앞으로 2, 30년이 지난 훗날, 젊은 시절에 김재익 장학금으로 대한민국에서 공부한 각 나라의 고위직 공직자들이 국제무대에서 대한민국의 공직자들과 친구로, 동문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각 분야의 최고 공직자들의 우정 어린 협력으로 복잡한 국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 될 것인가. 이 장학금이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들과 그들의 나라에게 희망찬 미래에 대한 약속이 되기를 정성 모아 기원한다.”

기부 의도와 소망이 이 말씀들에 알알이 담겨 있다. 이 분은 일생 부지런을 떨며 아꼈지만 모아 보니 얼마 되지 않더라고 되려 미안해 하셨다. 감상적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자꾸 눈시울이 뜨거워지는데….

사회를 지탱하는 힘

“비판과 반성을 촉구하는 분들도 있으나 가만히 보면 우리 사회에는 참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가는 분들이 많아요. 이분들이 삐걱거리는 사회를 지탱하는 진정한 힘이구나 생각할 때가 있어요.”

진정으로 보람되고 아름다운 삶은 무엇인가. 오늘 내내 생각해 보아야 할 것만 같다. 인터뷰 원고를 정리하는 노릇도 급하고 중요하지만,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해진다.

“오늘 너무 많은 얘기를 혼자 한 게 아닌가 모르겠네요.”

맛있게 끓여주신 커피를 한 잔 더 마시며 오랜 시간 당신의 지난 삶을 듣고 싶지만 안타깝다. 약속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앞에 있다.

인사를 드리고 댁을 나서면서 자꾸만 뒤돌아본다. 문득 궁금해진다. 대체 언제부터 ‘내’가 아닌 ‘우리’를 먼저 생각하게 되셨을까. 아무래도 천성적이신 것만 같다. 마음은 스스로가 다잡아 가는 것이지 아무도 거기에 간여할 수 없다. 사람의 삶은 별게 아니라 하지만 때로 한없이 숭고해지기도 한다. 이분의 삶이 그렇다.

- 글 최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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