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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날은 갔지만… ‘쓸모없는’ 인생도 아름답다[강동삼의 벅차오름]

화려한 날은 갔지만… ‘쓸모없는’ 인생도 아름답다[강동삼의 벅차오름]

강동삼 기자
강동삼 기자
입력 2023-12-09 07:55
업데이트 2023-12-09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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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정물오름 정상에서 펼쳐지는 남쪽 풍경에 넋을 잃는다. 도너리오름 앞 산방산, 형제섬, 가파도까지 눈에 밟힌다. 제주 강동삼 기자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정물오름 정상에서 펼쳐지는 남쪽 풍경에 넋을 잃는다. 도너리오름 앞 산방산, 형제섬, 가파도까지 눈에 밟힌다.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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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오름을 오르는 길에 만난 억새가 푸른 하늘에 닿아 한폭의 수채화를 연상시킨다. 제주 강동삼 기자
정물오름을 오르는 길에 만난 억새가 푸른 하늘에 닿아 한폭의 수채화를 연상시킨다.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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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오름 정상에서 한라산 정상까지 내다볼 수 있으나 구름에 가려 산능선만 보여준다. 제주 강동삼 기자
정물오름 정상에서 한라산 정상까지 내다볼 수 있으나 구름에 가려 산능선만 보여준다. 제주 강동삼 기자
‘보잘 것 없음’에 대한 초라함, ‘버림받음’에 대한 쓸모없어짐, 뒷방 늙은이 신세 같은 서글픔, 누군가의 빛에 가려진 그림자의 공허함….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산 52-1 정물오름에서 만난 ‘정물’을 보는 순간 드는 지리멸렬한 상념이다. 우물처럼 움푹 패인 곳엔 탁한 연못같은 물이 고여 있다. 돌담으로 동그랗게 둘러싸여 있지만, 돌담 위엔 허물어지지 않게 견고한시멘트가 발라져 있다. 정물에 걸린 푸른 하늘과 구름은 탁하지 않다. 조금 있으려니 구름만 홀로 어디론가 떠나갔다.

마치 가수 유열의 ‘화려한 날은 가고’ 노랫말처럼 한때는 찬란한 나날을 보냈을지 모를 정물이었다. ‘멀어져 간다. 나의 꿈도 간다. 잡을 수 없는 푸르른 날 모두 사라져 간다. 흩어지는 구름이 되어 간다. 눈부신 기억들은 모두 반짝이는 불빛이 되어 화려한 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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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오름 입구에 있는 정물샘. 한때는 이 일대 주민들의 식수원이었던 이 용천수는 지금은 연못처럼 흔적만 남아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정물오름 입구에 있는 정물샘. 한때는 이 일대 주민들의 식수원이었던 이 용천수는 지금은 연못처럼 흔적만 남아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이시돌목장 초기의 중요 식수원이었던 곳…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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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언택트여행지 정물오름
<20>언택트여행지 정물오름
제주도 서부지역의 중산간지대 해발 348m, 해안선 직선거리 11㎞에 위치한 이 정물샘은 4·3 당시 피난자와 6·25전쟁시 국군 훈련병들, 금악리와 인근마을 주민 특히 이시돌목장 초기에 중요한 식수원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강수량이 많고 비가 많이 와도 모든 물은 해안가로 흘러내려가 버리기 때문에 마실 물이 귀한 섬이었다. 용천수가 솟는 해안가에 제주사람들이 몰려 사는 이유가 다 있다. 특히 중산간 지역에서 식수를 구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 귀했는데, 식수로 사용할 수 있던 물 중의 한 곳이 정물샘이다. 이 샘은 물이 깨끗하고 양이 많아 이곳에서 꽤 먼 곳의 마을 사람들도 물을 길러다 마셨다고 한다. 배수로를 따라 형성된 주변의 못(습지)은 소, 말, 돼지들과 목마른 산짐승들이 이용하는 등 중요한 용천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명성은 사라지고 흔적만 간신히 남아 맴돌고 있다.

정물오름의 명칭은 오름 앞에 있는 정물샘의 이름에서 따왔다. 오름 북서쪽으로 넓게 벌어진 말굽형 화구를 가진 오름으로, 오름 동남쪽에 당오름이 이웃해 있다. 오름의 형태는 남서쪽에서 다소 가파르게 솟아올라 꼭대기에서 북서쪽으로 원만하게 뻗어 내렸다. 오름 북서쪽으로 두팔을 벌린 형태의 비탈 아래쪽 기슭이 정물이라 불리는 쌍둥이 샘이 있는데 이 샘 이름에서 오름 이름이 나왔다. 이 오름 서쪽에 조그만 알오름이 있는데 이를 정물알오름이라 한다. 표고는 469m이다. 이 오름의 들녘 자락에 있는 들판은 정물오름을 모태로 해 예로부터 으뜸가는 목장지대로 이용되고 있다.

이 오름에는 개가 가리켜 준 옥녀금차형(玉女金叉形)의 명당터가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가까운 금악리에 살던 한 사람이 죽자 그가 기르던 개가 상제의 옷자락을 끌어 이곳의 명당 터를 알려주었고, 그 후 후손이 큰 복을 받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래서인지 실제 오름 안팎 기슭에는 묘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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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오름 가는 완만한(왼쪽) 길과 험한 계단(오른쪽)의 가파른 길. 제주 강동삼 기자
정물오름 가는 완만한(왼쪽) 길과 험한 계단(오른쪽)의 가파른 길. 제주 강동삼 기자


#프로스트의 詩 ‘걸어보지 못한 길’처럼… 금악오름 마주한 정상, 360도 뷰가 아름다운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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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오름 서쪽 맞은편에 자리한 금악오름과 서해 풍경. 제주 강동삼 기자
정물오름 서쪽 맞은편에 자리한 금악오름과 서해 풍경. 제주 강동삼 기자
정물오름 주차장 입구 정물샘 앞에선 로버트 프로스트(1874.3.26~1963.1.29)의 ‘걸어보지 못한 길’처럼 ‘노랗게 물든 숲속에 두갈래 길이 나온다. ‘서운한 마음에 한참을 서서 덤불 속으로 난 한쪽 길을 끝도 없이 바라보다가 다른쪽 길을 택한다. 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던 시(詩)를 모방하지 않고 편한 길을 택한다. 왼쪽 길을 택했더니 오른쪽 길보다 훨씬 완만해 정상가는 길이 수월했다. 왼쪽 길을 적극 추천한다. 반면 오른쪽은 가파른 계단이다. 왼쪽 길로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 분화구 쪽에 억새들이 자라 바람에 하늘거린다. 억새가 많지는 않지만, 가을가을 끝자락, 억새를 벗삼아 오르는 맛이 제법 쏠쏠하다. 정상도 10여분이면 금세 오른다. 예상 밖으로 시야가 뻥 뚫려 제주 동서남북 360도 뷰, 그 멋진 풍광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특히 남쪽 산방산, 송악산, 가파도까지 아른거린다. 바로 발 아래에는 블랙스톤 골프장이 그림처럼 다가선다.

서쪽 앞에 마주한 오름은 금악오름(금오름). ‘힙’한 금악오름에 비하면 한적하기 이를데 없는 정물오름이다. 사람들의 발길에 치이지 않는 오름이다. 더욱이 그 풍광 만큼은 금악오름에 버금갈 정도다. 금악오름은 분화구를 돌면서 비양도, 차귀도 등 서해풍광을 바라봐야 하지만, 정물오름에선 정상 제자리에서 한바퀴만 돌아도 한눈에 제주를 품을 수 있다. 금악오름처럼 일몰시간때 가면 인생맛집을 찍을 수 있단다. 정상 벤치에 멍 때리다가 ‘쉬멍 놀멍 걸으멍’ 내려오기 제격이다. 안타깝게 이날은 아침 일찍 오르는 바람에 노을은 다음에 예약하련다. 또한 날씨마저 흐려 한라산 정상도 담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 석양이 아름다운 언택트 여행지 10곳 중 하나, 그 매력에 빠져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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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오름으로 가는 오솔길에서 만나는 억새물결. 제주 강동삼 기자
정물오름으로 가는 오솔길에서 만나는 억새물결. 제주 강동삼 기자
석양의 아쉬움은 제주도 공식 유튜브 채널(빛나는제주TV)에 올라온 영상으로 달래도 좋다. 최근에는 정물오름 영상 중 백패킹 영상이 올라와 눈길을 끌었다. 홍보 영상 속에서 남성은 정물오름 정상에서 노을을 벗 삼아 풍광에 사로잡혀 있다가 들판에 어둠이 깔릴 때쯤 즉석발열식품으로 끼니를 때우고 정상 벤치 위에서 침낭만을 활용해 하룻밤을 보냈고, 해뜨는 모습을 보며 하산하는 모습이 그럴싸하게 그려졌다. 영상만 놓고 봤을 땐 정물오름의 해가 지고 뜨는 아름다운 모습이 멋스럽게 담겨 있었지만, 현실에선 오름에서 취식을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불편한 장면이었다. 실수를 자각한 듯 영상은 바로 내려졌다. 정물오름이 그만큼 한적한 여행지임을 방증하는 셈이다.

실제 정물오름은 2020년 코로나19시대에 언택트 여행지 10곳 중 하나로 선정됐다. 서귀포 서건도, 조천 거문오름, 애월 휴림, 남원 물영아리오름, 남원 고살리 숲길, 성산 신풍리 밭담길, 조천 북촌리 4·3길, 한라산 천아숲길, 한경 무릉 자전거 도로, 한림 정물오름 등과 함께 비대면 여행지로 손색없는 곳으로 소개됐다. 코로나19이후 여행 트렌드도 점점 언택트해지고 있다.

쓸모 없어진 정물을 보며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 이야기가 연상된다. 중국전국시대 장석이라는 유명 목수가 엄청나게 자란 상수리나무를 두고 “저 나무로 배를 만들어보았자 가라앉을 것이고, 관을 만들어보았자 곧 썩을 것이고 그릇을 만들면 쉽게 깨지고 문짝을 만들어도 진이 흐를 것이다’라고 했다. ‘쓸모 없으니까 오래 산다’는 뜻이었다. ‘쓸모없어 쓸모있음(무용지용·無用之用)’을 의미했다. 정물은 쓸모있게 사용되다가 쓸모 없어진 반대의 경우지만, 결국엔 무용지용인건 매한가지다. 그래서일까. 정물오름에선 철학적인 사유를 하게 되는 듯 싶다. 화려한 날은 갔지만, ‘쓸모없는 인생’도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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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시돌목장 테시폰 주택 앞에서 바라본 정물오름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성이시돌목장 테시폰 주택 앞에서 바라본 정물오름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성이시돌목장 테시폰, 그리고 테시폰카페 ‘한형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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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시돌목장의 명물 테시폰주택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제주 강동삼 기자
성이시돌목장의 명물 테시폰주택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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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시돌목장의 테시폰 주택. 제주 강동삼 기자
성이시돌목장의 테시폰 주택.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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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클라라수도원으로 가는 길에서 사람들이 인생샷을 찍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성클라라수도원으로 가는 길에서 사람들이 인생샷을 찍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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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시도르카페 입구, 성이시돌목장을 일군 故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신부, 새미은총의 동산. 성이시돌목장 내 우유부단카페에서 파는 유기농 소프트아이스크림. 제주 강동삼 기자
왼쪽부터 이시도르카페 입구, 성이시돌목장을 일군 故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신부, 새미은총의 동산. 성이시돌목장 내 우유부단카페에서 파는 유기농 소프트아이스크림. 제주 강동삼 기자
정물오름은 성이시돌목장 테시폰 앞에서 바라볼때 가장 매력적으로 비춰진다. 목장에서 풀을 뜯는 말들 뒤로 완만한 능선이 치마폭처럼 펼쳐져 포근하고 아늑해지는 느낌이다.

테시폰 양식은 2000여 년 전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에서 가까운 테시폰이란 지역에서 만들어진 건축 양식으로 제주처럼 태풍이 잦은 지역에서도 잘 버틸 수 있는 구조다. 또 기둥 없이 내부 공간을 넓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현재 제주에는 20여채가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이곳 테시폰 주택이 2021년 7월 국가등록문화재(제812호)로 고시된 후 이런 안내 팻말이 눈에 띈다. ‘이시돌목장의 테시폰식 주택은 1954년 4월 선교사로 제주도에 부임한 아일랜드 출신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한국이름 임피제:1928.6.6~2018.4.23) 신부가 금악리의 황무지를 목초지로 개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고향에서 테시폰 건축기법을 익혀와 1980년대초 이시돌목장 주변에 건물을 지은데서 비롯됐다. 테시폰은 물결모양의 아치가 연속된 형태의 쉘 구조로 아치 형틀 비계 위에 가마니 등의 섬유 거푸집을 깐 다음, 기둥과 철근없이 시멘트만을 덧발라 만든 건축물이다. 시공 편의성 및 비용 절감 효과로 이시돌목장을 비롯한 제주 중산간 지역에 개척 농가를 분양하는 과정에서 해당 건축공법이 적극 도입됐다’고 쓰여있다.

그러나 이런 고즈넉한 곳에 고풍스런 테시폰 주택도 정물오름 앞에 있어야 비로소 더 옛스런 맛이 난다. 테시폰 앞 ‘우유부단’ 카페도 정물오름 덕분에 평화로움이 깃드는 듯 조화롭다. 그리고 달달한 연인들끼리 왔거나, 가족들이 들렀다면 이곳에서 파는 소프트 아이스크림(5000원) 한 입 문다면 더없이 완벽한, 달달한 하루가 된다. 진정한 유기농 아이스크림 홀릭이다. 요즘은 이시돌목장에서 성클라라수도원으로 가는 길목의 한적한 오솔길도 힙한 장소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시도르카페에서 돼지신부 임피제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시간도 꽤나 성스러워 정갈해지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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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한림읍 협재리 테시폰카페 한형수 가든은 테시폰 주택공법을 적용해 현대식으로 재해석 해내는데 성공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 테시폰카페 한형수 가든은 테시폰 주택공법을 적용해 현대식으로 재해석 해내는데 성공했다.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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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수정원과 카페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한형수정원과 카페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테시폰을 나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친구가 테시폰 카페를 소개해준다. ‘한형수 정원’ 테시폰카페(제주시 한림읍 협재리 1352)다. 테시폰을 손수 설계하고 시공해 재현한 주인은 정원에 카페와 화장실, 별채 공간까지 모두 3채를 그만의 느낌으로 재탄생시켰다.

2020년 오픈한 테시폰카페는 1층과 2층 구조로 돼 있을 만큼 천장이 매우 높으며 1층 아래에선 돌 터널을 지나 정원으로 나가게 설계돼 있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주인장의 나무 하나, 돌 하나에도 섬세하고 세심하게 공들인 흔적도 곳곳에서 배어나온다. 카페에서 커피와 함께 시그니처 소금빵을 맛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집 주인장 한형수씨는 “단순하고 소박하고 화려하지 않은 건물을 평소 짓고 싶었는데 테시폰이 가장 잘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다”며 “직접 설계해서 설계사무소에 맡겨 실행에 옮기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아무도 이 건축공법을 아는 사람이 없어 발수와 단열 등에 공들이다 보니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면서 “테시폰 주택이 제주도의 열악한 환경에 맞고 단순한 구조여서 제주 곳곳에 다시 보급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글 사진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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