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중 밴드부와 함께 남하… 나 따라 참전한 심재민 전사 ‘애통’”

“인천상중 밴드부와 함께 남하… 나 따라 참전한 심재민 전사 ‘애통’”

입력 2018-12-26 17:14
업데이트 2018-12-27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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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창립과 활동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18회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9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했다. 20년간 노력해 마침내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은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1950년 12월 18일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밴드부를 선두로 하여, 최초 목적지 경상남도 통영의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교)를 향하여 남하를 시작한 인천지역 6년제 중학교 중학생들의 남하 행진 사진.
1950년 12월 18일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밴드부를 선두로 하여, 최초 목적지 경상남도 통영의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교)를 향하여 남하를 시작한 인천지역 6년제 중학교 중학생들의 남하 행진 사진.
1951년 6월 7일 수도사단 향로봉 전투에서 이경종(당시 16세).
1951년 6월 7일 수도사단 향로봉 전투에서 이경종(당시 16세).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인천 중구 용동 178 (관람문의 032-766-7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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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석 인터뷰

일시 1999년 3월 19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편집실(이규원치과 1층)

대담 장인석(인천학도의용대 화평분대)

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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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가 실종된 인천 중학생들

1950년 6월 25일날 6·25전쟁이 일어났다. 며칠 후 우리 인천이 북한 공산군에게 점령당했는데, 많은 중학생이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실종되는 비극이 벌어지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가 유엔군의 9·15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인천이 수복이 된 후 북한 공산군 치하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치안 유지, 피난민 안내 등 호국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인천학도의용대 화평분대 조직

내가 살던 화평동에서도 뜻이 맞는 내 또래 학교 친구들과 같이 인천학도의용대 화평분대를 조직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으며 분대 본부는 지금의 인천극장 근방에 있었던 화수관이라는 빈 술집을 접수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화평분대를 조직한 우리들은 인망이 두터웠던 인천중학교 5학년 김영배를 분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치안 유지·피난민 안내 등 호국 활동

당시 화평분대 조직원은 화평동에 사는 학생들은 물론 화수동에서 사는 학생들도 많았다. 그것은 당시 화수분대 본부는 화도진 고개 넘어 괭이 부리에 있는 화수조합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화수동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화평분대 본부에서 가까운 학생들은 대부분 화평분대로 가입해서 치안 유지, 피난민 안내 등 호국 활동을 하였다.

인천학도의용대 화평분대 대원 명단

아직까지도 기억이 나는 인천학도의용대 화평분대 대장과 대원들은 7명이다.

대장 : 김영배 인천중학교 5학년 해병 6기

대원 : 장갑석 해성중학교 5학년 해병 6기

손홍근 인천상업중 5학년 해병 6기

손정기 인천영화중 4학년 해병 6기

장인석 인천상업중 4학년 해병 6기

이윤우 해성중학교 3학년 해병 6기

신명호 인천상업중 3학년 해병 6기

심재민 해성중학교 2학년 해병 6기
1951년 8월 24일 해병 6기에 자원입대 후 첫 휴가 나와 고향 인천에서 찍은 기념사진. 뒷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장인석, 이윤우. 앞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손홍근, 김영배.
1951년 8월 24일 해병 6기에 자원입대 후 첫 휴가 나와 고향 인천에서 찍은 기념사진. 뒷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장인석, 이윤우. 앞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손홍근, 김영배.
1950년 12월 18일 후배 심재민과 같이 남하

이렇게 조직하여 호국 활동을 하는 가운데도 시간은 흘러 그 해도 다 저무는 1950년 12월 중순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인천학도의용대 본부로부터 12월 18일날 인천학도의용대는 모두가 남하(南下)하니까 화평분대는 남하할 준비를 하고 18일날 축현국교 운동장으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12월 18일 아침이 밝아왔다. 우리들은 화평 분대 본부 앞에 전원 모여 인원 점검을 마치고 집합장소인 인천축현국민학교(현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운동장에 모였다가 수원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날 우리들의 남하 행렬 맨 앞에는 인천상업중학교 밴드부가 행진곡을 연주하였다. 첫날 우리들은 지치기 시작하였으며 졸면서 걸어 도착한 곳이 안양이었다. 안양에서 하룻밤을 지낸 우리들은 이튿날 수원을 향하여 또 걷기 시작했다.

수원에서부터는 기차를 이용했다. 당시 기차는 서울서부터 내려오는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어서 화물차 칸 안에는 발 디딜 틈이 없어 우리들은 기차 화물차 칸 지붕 위에 올라앉아 내려갔다. 전쟁의 국가 위난 시기라서 어느 역에 정차하면 몇 시간에서 심지어 며칠 동안 기차가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경우도 많았다.

화평분대 대원 마산에서 해병 6기에 모두 입대

이렇게 우리 인천학도의용대 화평분대 대원들은 인천에서부터 마산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흐트러짐 없이 잘 도착하여 대기 중일 때 고향 인천 소식을 들으니까 고향 인천은 또다시 북한 공산군에게 점령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하는 것이었다. 그때 마침 마산에서 해병대 모집이 있어 우리들은 그 해병대 모집에 지원하기로 하고 전원 모집장소인 어느 학교 운동장을 찾아갔다. 그날 전원 해병대에 합격한 우리들은 그날로 진해 경화국민학교에 있는 해병훈련소로 걸어가 입소하였다. 이때 내 바로 위 형님(장갑석·해성중학교 5학년 재학 중)도 같이 입소하였다.

해병 6기는 대부분 우리들 인천 학생들이었다. 이후 해병대 전방 전투지역에 배치된 나는 도솔산 전투 등 각종 전투에 참전한 후 1953년 7월 휴전이 되고 며칠 뒤 제대하였다.
1999년 2월 16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해병 6기 심재민 묘를 참배하는 이규원 치과 원장. 심재민은 1935년 2월 26일 인천 동구 화평동 163번지에서 태어나서, 인천송림국교를 9회로 졸업하고, 인천해성중학교 2학년 재학 중인 15세에 동네 형 장인석을 따라서 인천에서 마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해병 6기로 자원입대하여 1951년 7월 7일 강원도 양구 도솔산 전투에서 16세 어린 나이에 전사하였다.
1999년 2월 16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해병 6기 심재민 묘를 참배하는 이규원 치과 원장. 심재민은 1935년 2월 26일 인천 동구 화평동 163번지에서 태어나서, 인천송림국교를 9회로 졸업하고, 인천해성중학교 2학년 재학 중인 15세에 동네 형 장인석을 따라서 인천에서 마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해병 6기로 자원입대하여 1951년 7월 7일 강원도 양구 도솔산 전투에서 16세 어린 나이에 전사하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전사한 동네 후배 심재민

심재민은 나하고는 같은 동네에서 살았으며, 나이는 나보다 3살 어린 15살이었다. 나와 같이 인천학도의용대 화평분대 소속 대원으로 함께 치안 유지, 피난민 안내 등 호국 활동을 하다가 마산까지 같이 남하하여, 해병 6기에 자원입대하였다.

우리 화평분대에서 가장 어린 나이여서 마산까지 남하할 때는 내가 꼭 심재민을 열심히 챙겼었다. 훈련소에서 같이 훈련받았으나, 배치될 때 헤어졌었다.

6.·25 당시 심재민이 살았던 집은 화평동과 화수동 경계지점인 화평동 163번지였으며, 우리 집과는 한집 건너였다. 내가 심재민의 전사 소식을 알게 된 것은 1951년 7월 해병 제1연대 본부인사과에서 근무할 때였다. 당시 육군이 맡고 있던 강원도를 우리 해병대가 맡아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나는 사상자 실태 파악을 하는 중에 전사자 명단을 보니까 심재민이 전사자 명단에 올라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심재민이 어떻게 전사했나 하고 친구들에게 알아보니까 대대장 연락병으로 도솔산 전투에 참전하여 지뢰를 밟아 전사했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49년이나 흘렀지만 나를 따라서 15살에 자원입대하고 16살에 전사한 한동네 후배 심재민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흘러내린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1999년 3월 19일 이규원치과 3층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 인터뷰·녹음을 마친 장인석.
1999년 3월 19일 이규원치과 3층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 인터뷰·녹음을 마친 장인석.
장인석

▲인천학도의용대 화평분대 소속 해병대 6기 <군번 9210466>

1932년 2월 6일 : 인천 화평동 125번지 출생. <인천서림국민학교 졸업(2회)>

1950년 9월 15일 : 인천학도의용대 화평분대 대원으로서 치안 유지, 피난민 안내 등의 호국(護國) 활동.

1950년 12월 18일 : 인천상업중학교 4학년생으로 인천학도의용대를 따라서 남하를 시작.

1951년 1월 24일 : 마산에서 해병 6기 신병 모집에 지원하여 입대 후 도솔산 전투 등에 참전.

1953년 7월 30일 : 만기 제대.
2018-12-27 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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