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만에 재심 첫 공판…”판결문이 괴물처럼 보였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당사자인 강기훈(48)씨가 21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주장했다.20일 서울고법 형사10부(권기훈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재심 공판에서 강씨는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분노 속에서 단 한 가지 놓지 않았던 것은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명제였다”고 말했다.
검은 양복을 입고 수척한 얼굴로 피고인석에 앉은 강씨는 미리 적어온 항소 이유서를 5분가량 읽어내렸다.
강씨는 항소 이유서에서 “원심 판결 당시 검찰의 공소장과 법원 판결문은 비상식과 모략으로 가득 찬 괴물처럼 보였다”며 “실체적 사실의 규명은 뒤로 한 채 단지 나를 범인으로 몰려고 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재심 기회를 열어준 사법부에 지금 고마워해야 하는지 모를 정도로 불신이 크다”며 “법정을 존중하고 최대한 예의를 지키겠지만, 과거처럼 인격을 무시하면 가만히 듣고 있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강씨 측 변호인은 사건 당시 서울중앙지검이 강씨 등으로부터 압수해 간 메모와 책 등 증거물을 재심 증거로 새로 제시하고 싶다며 검찰 측에 찾아올 목록을 전달했다.
검찰 측은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할 만한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된 것은 아니라는 대법원 재심 개시 결정을 인용하며 심리 범위부터 다시 정해야 한다고 맞받았다.
이에 재판부는 내년 1월 31일 공판준비기일을 한 차례 더 열어 증거 채택 등 본격적인 심리를 위한 준비 절차를 갖기로 했다.
공판 직후 강씨는 건강이 극도로 나빠진 상태라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지난 5월 간암 수술을 받고 최근까지 통원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1991년 5월 서강대 건물 옥상에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국 부장 김기설씨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하자 검찰이 유서를 대신 써줘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당시 전민련 총무부장이던 강씨를 기소한 사건이다.
당기 검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소속 감정인 김모씨의 필적 감정 결과를 기소의 결정적인 근거로 제시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추가 기소된 강씨는 징역 3년이 확정돼 1994년 만기 출소했다.
필적이 문제가 됐다는 점에서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에 관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강씨가 김씨의 유서를 대신 쓰지 않았다는 취지의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강씨는 2008년 1월 재심을 청구해 지난 10월 3년여 만에 대법원에서 재심 개시 결정을 받아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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