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장재판에 승소는 ‘무의미’…당사자 죽거나 강제추방

늑장재판에 승소는 ‘무의미’…당사자 죽거나 강제추방

입력 2015-08-30 10:32
수정 2015-08-30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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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끌어 이긴 재판 배상금은 고작 230만원

현대미포조선 노동조합 대의원이었던 김모씨는 회사가 부당한 대우를 하고 있다는 유인물을 나눠줬다가 1997년 해고됐다.

김씨는 2000년 2월 회사를 상대로 해고무효 소송을 내 1∼3심 내리 승소판결을 받았지만, 실제 복직까지는 5년이 넘게 걸렸다.

1심 판결에 10개월, 항소심 1년 2개월, 대법원 3년5개월이 각각 걸렸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사건을 3년5개월이나 묵히는 바람에 복직이 늦었다고 생각한 김씨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당사자가 요청한 권리구제 실익이 사라지지 않을 합리적 시간에는 적어도 선고가 이뤄져야지만 헌법이 보장한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지켜진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게 김씨의 생각이었다.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은 2007년 3월 사상 처음으로 대법원에 재판이 늦어진 이유를 소명하라고 요구하기도 했지만 결국 원고 패소로 선고했다.

늑장 판결로 권리구제가 늦어지거나 실익이 없어지는 일은 지금도 반복된다.

30일 대법원에 따르면 2013년 기준으로 상고심에 접수된 지 2년 넘도록 판결 선고가 이뤄지지 않은 형사 사건은 267건에 달한다.

행정 사건은 190건, 민사 본안 사건은 325건이었다.

민사소송법에는 판결은 소가 제기된 날부터 5개월, 항소심과 상고심은 기록을 받은 날부터 5개월 안에 각각 선고한다고 돼 있다. 법원은 이 조항을 반드시 지키지는 않아도 되는 훈시규정으로 해석한 탓에 선고가 늦어져도 별다른 제재 방안은 없다.

대법원 사건 가운데 가장 오래 계류 중인 것은 서울외곽순환도로 인근 아파트 주민들이 도로 소음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며 한국도로공사 등을 상대로 낸 소송이다.

2004년 3월 제기된 이 소송에서 주민들은 1·2심 모두 일부 승소판결을 받았다. 사건은 2008년 7월 상고됐지만 대법원은 7년이 넘도록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판결 선고가 늦어지면서 당사자가 세상을 떠나 실질적인 권리구제에 실패한 사례도 있다.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 여운택 씨는 한국과 일본에서 전범기업을 상대로 17년간 법정 다툼을 벌였지만, 대법원 확정 판결을 보지 못한 채 2013년 12월 숨을 거뒀다.

그가 2005년 일본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소송은 대법원 파기환송과 재상고를 거쳐 아직 대법원에 계류중이다.

1970년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옥살이했던 성유보 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은 2011년 재심을 청구했지만 2014년 10월 서울고법의 무죄 판결이 나기 며칠 전 세상을 떠나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폐암환자 등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도 지난해 소 제기 15년 만에 대법원 판결이 선고됐지만, 당사자 다수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선고가 너무 늦어 승소 판결을 받고도 웃음 대신에 울음을 터트려야 하는 사례도 있었다.

광주 시영아파트 주민들은 2000년 분양권자인 광주시를 상대로 하자 책임을 묻는 소송을 내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지만, 결코 웃을 수 없었다.

대법원 파기환송 등을 거쳐 14년간 법정 투쟁에 많은 시간과 돈을 쏟아부었음에도 1인당 배상액이 평균 230만원에 그쳤기 때문이다.

원고 수가 200여 명이었지만 배상액은 주민들이 청구한 금액에 크게 못 미치는 4억6천여만원이었다. 막대한 희생을 치른 탓에 이겼음에도 진 거나 다름없다는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인 셈이다. 이런 소송은 두 번만 하면 이겨도 패가망신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결성한 노조도 지난 6월 소송을 낸 지 10년 만에 내려진 대법원 판결로 합법화가 됐지만, 그간 초대 위원장 등 많은 노조원이 강제추방됐다.

부장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아무리 좋은 판결이라도 선고가 늦으면 소용이 없어지는 경우가 있다”며 “소송이 장기화하면 당사자가 겪는 고통이 가중되고 지출해야 하는 비용도 늘어나 결국 사법불신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대법원이 처리해야 할 사건 수가 너무 많은 것이 장기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라며 “현재 대법관들이 평일은 물론 주말까지도 밤늦게 일할 만큼 업무가 과중한 상태로 대안은 결국 상고법원밖에 없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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