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男세상, 乙女의 반격] “성폭력 사과받을 때까지… 딸과 함께 뛸 겁니다”

[甲男세상, 乙女의 반격] “성폭력 사과받을 때까지… 딸과 함께 뛸 겁니다”

김헌주 기자
김헌주 기자
입력 2018-04-08 22:42
업데이트 2018-04-09 09:56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2부) 미투가 바꾸는 세상 ⑦아버지의 ‘위드유’

한 달 전 큰딸의 ‘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 폭로 이후 “소중한 일상을 잃었다”는 회사원 이승(49)씨는 지난 5일 고교 동창들과의 저녁 자리에서 봉투 한 장을 건네받았다. 이 봉투에는 편지 한 통과 함께 현금 315만원(100만원짜리 수표 3장, 10만원짜리 수표 1장, 5만원짜리 1장)이 담겨 있었다. 그 자리에서는 차마 편지를 읽을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아내와 두 딸을 불러 모은 뒤 편지를 열었다. ‘내 친구 승아’로 시작되는 이 손 편지에는 이씨의 큰딸이 겪은 아픔과 가족이 감내해야 할 고통에 대해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며 마음을 함께하고 있다”는 위로의 내용이 나온다. 편지 뒷장에는 “변호사 선임 비용 등에 쓰라”며 이씨를 후원한 친구들 63명의 명단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편지를 다 읽은 네 식구는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이씨는 서울 M여중에 다녔던 큰딸 이모(22)씨가 7년 전 중학교 교사로부터 1년여간 상습적으로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지난달 7일에야 처음 알게 됐다. 그날 오전 이씨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대로 학교로 돌진할까”, “가해 교사를 찾아가 복수라도 해야 할까” 등 머릿속이 복잡했다. ‘딸에게는 어떤 위로를 해 줄까’를 하루 종일 고민하다 그날 밤 딸에게 “왜 그때 얘기 안 했어”라고 말해 버렸다. 뉴스에서나 볼 법한 일이 현실로 닥치자 이씨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딸이 전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미투 폭로 글을 올렸다는 얘기에 이씨는 처음에 난색을 표했다. 이씨는 그 정도 선에서 수습을 하기로 하고 법원·검찰에 아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딸에게는 “변호사와 상의하기 전에는 SNS에 글을 올리지 말자”라고 말했다. 그런데 딸이 “왜 입을 막느냐”며 격하게 반발했다. 사건이 터지고 이틀이 지나 이씨가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씨의 친구는 “딸의 방식이 맞는 것 같다”고 조언했다. 그는 동의할 수 없었다. 아무 힘도 없는 딸아이가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고 싸우는 이 방식이 대체 뭐가 맞는 것이냐고. 그러나 친구의 말을 곱씹은 그는 만 하루가 지난 뒤 딸을 향해 ‘위드유’(#With You·당신을 지지한다)를 선언했다. “모든 걸 버리고 싸운다는 것, 죽기로 마음먹고 싸운다는 게 잘 싸우는 것”이란 결론을 내린 것이다. 앞으로의 모든 싸움은 딸이 진행하고, 이씨는 옆에서 지원만 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이씨도 자신의 SNS와 고교 동기 및 총동문회 온라인 계정에 딸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알렸다. 지난 5일 이씨 동기들이 ‘위드유’에 나설 수 있었던 계기다.

현재 이 사건은 지난 4일 고소장이 접수되면서 내사 단계에서 수사로 전환됐다. 경찰은 지난 6일 학교 측에도 수사 개시 통보를 했다. 이씨는 8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 분노를 폭발시켰다면 우리 가족은 더 힘든 길을 걸었을 것”이라면서 “가해 교사가 형사 처벌을 받는 것과 별개로 직접 사과를 받을 때까지 딸과 함께 뛸 것”이라고 말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2018-04-09 9면
많이 본 뉴스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