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당시 10대 어린 나이로 일본 군수회사에 강제동원, 광복 이후 일본의 사과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관련 소송을 이어온 김성주 할머니가 영면했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7일 오후 광주 북구 영락공원묘지에서 김 할머니의 화장이 거행됐다고 밝혔다.
김 할머니의 마지막 길에는 유족과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찾았다.
전남 순천이 고향인 김 할머니는 만 14세 나이인 1944년 5월께 순천남초등학교 졸업 직후 일본인 담임 선생의 권유와 강압에 의해 일본으로 떠났다.
김 할머니는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공장에서 임금 한 푼 받지 못하고 고된 노동을 강요받았다. 철판을 자르는 선반 일을 하다 왼쪽 검지 손가락이 잘리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김 할머니의 잘린 손가락을 주워다 “오끼(大きい: 크다), 아이고 크다”하며 하늘로 던지면서 놀렸다.
1944년 12월7일 도난카이(東南海) 지진 당시에는 무너지는 건물더미에 깔리면서 발목에 큰 부상을 입었다.
해방 후 구사일생으로 고향에 돌아왔지만 일본에 다녀왔다는 이유 하나로 주변에서 온갖 인신모욕과 구박을 듣는 등 평온 생활을 가져 보지 못했다.
뒤늦게 용기를 내 양금덕 할머니 등과 함께 관련 소송에 나섰지만 2008년 11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기각 패소했다.
이후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의 도움을 받아 2012년 10월 일본 소송 원고들과 함께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광주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 6년여 만에 2018년 11월29일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미쓰비시 측이 배상 이행을 거부하자 원고 측은 미쓰비시중공업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을 단행, 김 할머니도 미쓰비시중공업 특허권 2건을 압류했다.
윤석열 정부가 지난해 3월 한일관계 개선을 구실로 강제동원 제3자 변제 방안을 발표하자 김 할머니는 국회에서 열린 강제동원 정부 해법 강행 규탄·일본의 사죄배상 촉구 긴급 시국선언에 참여해 울분을 쏟아냈다.
이날 김 할머니의 마지막 여정에는 일본 소송을 도운 현지 단체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회’(나고야소송지원회)도 추모 글귀를 보내왔다.
다카하시 마코토·테라오 테루미 나고야소송지원회 공동대표는 추모 글귀를 통해 ‘(김 할머니는) 주변의 오해와 편견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길고 긴 소송 과정에서 누구보다 용기있게 싸웠다’고 전했다.
또 ‘아직 일본정부와 미쓰비시 등 가해 기업들에게 사죄와 배상을 쟁취해내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회원들의 마음을 대신해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도 했다.
김 할머니와 같은 피해자가 더는 없어야 한다며 정부의 각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상임대표는 “할머니들이 일본을 상대로 싸우는 동안 국가는 어디있었는가. 대법원 판결이라는 중요 결실을 맺었음에도 정부는 피해자들이 강제집행과 같은 정당한 권리를 쓸 수 없도록 의견서까지 내가며 방해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한일 관계 회복이라는 미명 아래 피해자들이 시간이라는 넘을 수 없는 벽에 가로 막혀 고사하고 있다. 정부는 더이상 피해자들을 한일관계 개선의 희생양으로 삼지 말라”고 호소했다.
김 할머니가 숨지면서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지원한 소송 당사자 중 대법원 승소 확정 판결을 받은 일제 국외 강제노역 생존자는 양금덕·김영옥 할머니만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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