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 여제, 비인기 종목의 꿈을 들어 올리다
‘역도 여제’ 장미란(32)은 바벨을 내려놓은 지 꼭 2년 반 만인 지난 8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을 끝으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선수위원의 임기를 마치는 문대성(39)의 ‘예비 후계자’에 이름을 올렸다. 4명의 후보 가운데 아테네올림픽 탁구 금메달리스트인 유승민이 최종 낙점됐지만 예상을 깨는 결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탈락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2년 전 그의 은퇴식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20대에 세계를 들어 올렸던 장미란은 당시 기자회견장에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미래를 말했다. 당시 장미란은 IOC선수위원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이제 와서 그에게 탈락의 변을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 올림픽 스타에서 장미란재단 ‘이사장’으로 변신한, 서른두 살 인간 장미란의 새로운 삶이 궁금해 그를 서울 서초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장미란이 지난 8월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와 함께 광복 70주년을 맞아 ‘태극기 올바로 그리기’ 동영상을 제작해 유튜브에 공개하고 있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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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란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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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출마설 금시초문… 제안 와도 생각 없어
그는 운동을 하지 않으면 체력이 못 버틴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도 그럴 것이 은퇴 후 장미란은 잡힌 일정대로 움직여야 할 만큼 하루하루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운동할 때는 운동에만 집중하면 됐는데 지금은 재단 일을 비롯해서 대통령직속청년위원회, 강연, 은퇴선수 모임 등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이 많아 정신이 없단다. “얼마 전에는 체육인 대표로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활동을 했는데, 정부에 이렇게 다양한 부처가 있는지 미처 몰랐어요. 새로운 것을 배워 간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은퇴한 스포츠 스타 중 유독 사회적으로 왕성한 외부 활동을 하다 보니 뜻하지 않은 소문도 무성했다. 지난 6월 여의도에는 국내 최고 역도 선수의 총선 출마설이 담긴 증권가 정보지가 나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장미란을 거론했다. 그의 친분과 행보를 정치적으로 연관시키는 시선도 생겼다. “총선 출마설은 금시초문입니다. 제안받은 적도 없고요.”
제안이 오면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냐고 물었더니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저는 뭔가를 할 때 큰 그림을 그리고 시작하는 편이 아닙니다. 지금 하는 활동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기에 하는 것뿐이고요. 저는 제 능력이 안 되는 일에 대해서는 하려고 하지 않아요. 평소 스트레스를 잘 안 받는 비결이죠.”
‘역도 여제’ 장미란은 올림픽 스타에서 비인기 종목 꿈나무를 지원, 육성하는 장미란재단 이사장으로 변신해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8월 6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 후보선정 면접을 보기 위해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 들어서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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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OC선수위원에 도전한 것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선수위원은 올림픽 금메달하고 같은 거예요. 운동선수라면 모두 하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운도 따라줘야 하고요. 아쉽긴 했어요. 하지만 되신 분이 열심히 하셔서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빡빡한 그의 일정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재단 일이다. 그는 현재 비인기 종목 꿈나무를 지원, 육성하고 은퇴 선수 재교육·청소년 체육활동 권장 프로그램 등을 기획하는 ‘장미란재단’의 어엿한 이사장이다. 그는 “이사장 할 사람이 없어서 내가 하는 것”이라며 농담을 던졌지만 체육인 후배들에 대한 애정은 깊었다.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던 역도 후배 아이가 있었어요. 성적이 신통치 않아 불러 주는 대학도 없고 팀도 없는 상황이었죠. 겨우 19살인데 자기가 실패했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안타까웠습니다. 운동만 했던 친구들, 특히 지방에 있는 아이들은 대학, 실업팀에 가는 것 외에 다양한 길이 있다는 걸 잘 몰라요. 그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재활, 스포츠 행정 등 사회 진출에 대해 조언도 해주고 용기도 북돋아 줍니다. 애들이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 많은 보람을 느껴요. 인생에서 중요한 건 과정이지 성공이 아니잖아요.”
최고의 자리에 올라봤기에 할 수 있는 말 아니냐고 되물었다. “저는 올림픽에서 1등도 해보고, 2등도 해보고, 4등도 해봤어요. 메달 못 땄다고 위축된 적도 없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고 ‘나는 금메달리스트다’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죠. 하루하루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보냈는지, 목표를 위해 잘 싸웠는지 아닌지가 제일 중요했어요. 운동하는 친구들뿐만 아니라 10대들이 결과에만 매몰돼 있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워요.”
●소외된 체육인들 환경 개선 위해 노력
선수 시절 양손을 꼭 쥔 채 무릎을 꿇고 두 눈을 꼭 감았던 장미란의 ‘기도 세리머니’가 떠올랐다. 그가 2012년 런던에서 ‘4등’의 감동을 선사했던 것도 떳떳한 과정을 거쳐 온 장미란의 진심이 전해졌기 때문은 아닐까.
20대에는 올림픽 챔피언이 됐고 32세에는 IOC선수위원에 도전했다. 그의 새로운 꿈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저한테 다들 이젠 목표가 뭐냐고 물어보시는데 그럴 때마다 더이상 제게 비전을 묻지 말아 달라고 대답해요(웃음). 당분간 전 제가 할 수 있는 일(체육인 관련)을 하면서 현실에 충실하고 싶어요.”
그가 하고 있는 일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결국 현실을 바꾸는 일이 될 수밖에 없지 않으냐는 의문이 들었다. 새누리당 이에리사 의원이 2012년 발의한 체육인 처우 개선 관련 내용을 담은 체육인복지법은 국회에 3년 넘게 계류 중이고 지난 7월에는 역도 영웅 김병찬의 비극적인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쉽게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다만 제가 하는 일, 그 과정을 통해서 한두 명이라도 변화되기를 바라면서 하는 거죠. 무엇보다 아이들하고 노는 것이 재밌습니다. 당분간은 목표를 두지 않고 일을 즐기고 싶어요.”
인터뷰 내내 그는 단어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선택할 만큼 신중했지만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에는 확신에 차 있었다. 아테네에서 런던까지 세 번의 드라마를 쓴 ‘영웅’ 장미란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든 쉽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 같다.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장미란은
▲1983년 10월 9일 출생 ▲170㎝ ▲고려대 체육교육학 학사 ▲용인대 대학원 체육학 박사과정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 역도 75㎏ 이상급 은메달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여자 역도 75㎏ 이상급 은메달 ▲ 2008년 베이징올림픽 역도 여자 75㎏ 이상급 금메달 ▲2009년 체육훈장 청룡장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여자 역도 75㎏ 이상급 금메달 ▲2012년 런던올림픽 여자 역도 75㎏ 이상급 4위 ▲ 2013년 1월 10일 현역 은퇴 선언 ▲ 2013년~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 위원 ▲ 2015년 광복70주년 기념사업회 위원 ▲ 현 장미란재단 이사장
2015-10-03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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