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공약 베끼기 허실/구본영 논설위원

[씨줄날줄] 공약 베끼기 허실/구본영 논설위원

입력 2012-02-14 00:00
업데이트 2012-02-14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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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학원에서 첫 수업 때였다. 자기 소개 뒤 교수가 맨 먼저 입에 올린 단어가 ‘표절’이었다. 즉, ‘다른 사람의 저작물의 일부라도 몰래 베끼는 일’에 대한 엄중한 경고였다.

표절은 선진국의 강단에선 가장 부도덕한 행위로 치부된다. 적발되면 치팅(cheating)을 하다 들켰을 때보다 더 엄한 처벌을 받는다. 여기서 치팅은 흔히 커닝(cunning)이라는 잘못된 표현으로 쓰이지만, 시험볼 때 부정행위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다. 반면 표절(plagiarism)은 ‘어린아이 납치범’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다른 사람의 창의를 무단 인용하는 것은 남의 ‘정신적 아이’를 훔치는 것과 같다는 뜻일 게다.

19대 총선을 앞두고 정당들 간 공약 베끼기가 횡행한다는 소식이다. 국민의 복지 욕구에 앞다퉈 편승하면서다. 이를테면 민주당의 무상 급식·보육·의료 공약은 과거 민주노동당이 창당 때 내세운 공약과 판박이 같다. 새누리당의 고교 전면 의무교육 공약도 2000년 민노당이 내건 공약을 빼닮았다. 요즘 여야가 내놓는 인기영합성 정책들이 데자뷔 현상(기시감·旣視感)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물론 다른 창작물과 달리 공약을 갖고 엄정한 저작권을 물을 순 없다. 어차피 각 당이 다른 나라의 제도를 베끼거나, 과거의 정책을 새로 포장해서 내놓는 형편이 아닌가. 원전을 찾아내는 것은 고사하고, 인용하면서 출처를 밝히기도 애매하다는 얘기다. 실제로 민노당의 공약도 기실은 북유럽 국가의 복지정책을 벤치마킹한 것이라고 한다. 정작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은 재정 파탄을 우려해 현금을 지급하는 복지는 줄이고 있는 형편이지만.

민주당의 무상 의료 공약을 보며 한 탈북자의 말이 생각났다. “무상 의료를 선전하는 북한의 의료시설에는 치료에 쓸 약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요지였다. 사병 월급을 40만원까지 인상하겠다는 새누리당의 공약은 2002년 대선에서 민노당이 내건 사병 월급 현실화 공약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러잖아도 60만 대군을 유지하느라 엄청난 국방비가 소요되는 터에 가당키나 한 일일까. 혹여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 등 세 나라는 우리보다 소득도 월등히 높고 병력을 다 보태도 6만명이 안 되기에 가능할진 모르지만. 여야가 국민에게 도움이 될 정책을 서로 참고하는 것은 나무랄 일은 아닐 게다. 하지만 누울 자리도 안 보고 다리를 뻗듯 선심성 공약을 주거니 받거니 베껴 내놓는다면 가공할 일이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2012-02-14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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