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 ‘설날’과 전통을 생각하다/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문화마당] ‘설날’과 전통을 생각하다/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입력 2013-02-21 00:00
업데이트 2013-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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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한국의 모든 전통 명절은 음력을 기준으로 돌아간다. 근대의 바람이 불도저처럼 이 땅을 갈아엎어 버린 지난 100여년의 세월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설과 추석은 전통의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지 잘 보여준다.

청일전쟁(1894~1895)으로 청나라(중국)가 이 땅에서 물러간 데 이어, 을미사변(1895)으로 다시 집권한 친일내각이 1895년에 처음으로 태양력(서양력)을 국가의 공인 달력으로 공표한 후로 양력과 음력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1910~1945)와 미군정기(1945~1948)를 지나는 동안 갖가지 우여곡절과 강압정책이 있기는 했어도, 누구도 거스르기 어려웠던 근대화라는 ‘쓰나미’에 힘입어 양력은 이 땅의 일상에 뿌리를 깊이 내렸다. 음력은 윗목의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심지어 겨레 최대의 명절인 설, 즉 음력설은 아예 공휴일조차 되지 못했다. 일본식 근대화를 꿈꾼 박정희 집권 때(1961~1979) 초·중·고를 다닌 나는 양력으로 대개 2월 초순이나 중순에 걸리는 음력설(구정)에도 학교에 등교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공식적으로 구정은 아무 날도 아니었다.

구정이 권토중래의 첫발을 디딘 것은 1985년이었다. 그렇지만 ‘신정파’의 반발도 만만치 않아, 구정은 단지 ‘민속의 날’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당일에 한해 공휴일로 인정받았다. 한국의 ‘공식 설날’은 여전히 신정 곧 양력설이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에서 1989년 마침내 음력설이 옛 영광을 되찾아 더 이상 ‘민속의 날’이나 ‘구정’이 아닌 ‘설’로 당당히 제자리를 찾았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의 전통을 되살린다는 게 가장 큰 명분이요, 취지였다.

요즘은 글로벌시대다. 그렇다면 설은 영어로 뭐라 할까? 설은 ‘New Year’s Day’이며, 물론 양력을 따른다. 그렇다면 음력설은 영어로 뭘까? 바로 ‘Chinese New Year’s Day’다.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한 달력은 죄다 중국의 역(曆)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교민들도 음력설이 다가오면 한국에서와 비슷하게 가족이나 친지, 이웃을 방문해 음식을 나누며 즐겁게 교유한다. LA 코리아타운에서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나 아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한국 전통인 설을 잘 쇠어도, 국제무대에서 그것은 ‘Chinese New Year’s Day’일 뿐이다. ‘Korean New Year’s Day’라는 말은 유통되지 않는다. 그저 ‘중국 설’에 한국의 설도 고스란히 병합되어 버린다.

가장 한국적인 설 명절이 한국의 울타리만 벗어나 세계무대에 오르면 가장 중국적인 명절로 둔갑하는 기막힌 현실. 그 기나긴 2000년 역사의 무게. 독자적 달력을 만들지 못하고 중국의 정삭(正朔)을 받들어야 했던 한국 역사의 아픈 유산이 지금은 최대의 전통으로 살아났다. 일본이 강요한 양력설이 싫어 음력설을 복원했으나, 이 글로벌시대에 한국의 설은 중국 설에 다시 복속된 것이다.

전통이란 무엇일까? 전통은 바뀌면 안 되는 것일까? 전통은 반드시 우리 고유의 것일까? 그렇다면 ‘고유’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우리 것으로 알고 있는 한국 문화의 뿌리는 과연 어디에 닿아 있을까? 이번 설을 지내며, 문화로서의 설을 세계적 시각에서 확장해 생각해 보았다.

2013-02-2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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