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표기법은 쉽게 바꾸어서는 안 된다/조남호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기고] 표기법은 쉽게 바꾸어서는 안 된다/조남호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입력 2013-03-04 00:00
업데이트 2013-03-04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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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호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조남호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지난달 7일자 서울신문에 임형주씨가 쓴 ‘시대 흐름에 맞는 우리말 표기법’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임형주씨는 외래어·외국어 표기를 시대 흐름에 맞춰 대다수의 사람이 편하게 발음할 수 있도록 수정 보완하고 개정하는 ‘유연한 정통성’, ‘진보적 정통성’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 요청은 외래어 표기의 성격을 일부 오해한 데서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국가에서 외래어 표기법을 관리하고 있는데 담당하는 기관이 국립국어원이다. 왜 외래어 표기법을 정하게 되었나? 우리말과는 발음이 다른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말은 적을 때 여러 가지로 표기가 되는 일이 흔하다. ‘액세서리’를 예로 들면 ‘악세사리, 액세사리, 악세서리’와 같은 표기도 사용되고 있다. 어느 것을 선택할지 결정하기 쉽지 않아서 원칙을 정한 외래어 표기법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원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임형주씨는 ‘팝페라’를 ‘파페라’로 적는 매체가 있다고 지적했다. 신문을 지적한 것이 아닌가 한다. 신문은 외래어 표기법에 능통한 교열기자가 교열한다. 그런 신문에조차 두 표기가 등장하는 것은 둘 다 가능한 표기이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1991년부터 정부언론외래어심의 공동위원회를 구성해 표기가 정해지지 않은 말의 한글 표기를 확정, 널리 알리는 일을 꾸준히 해 오고 있다. ‘팝페라’는 아직 이 위원회에서 심의하지 않은 말이다.

외래어 표기를 정할 때 원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원칙에 어긋나도 관용을 존중해 표기한다고 외래어 표기법에도 명시돼 있다. 그래서 이미 표기가 하나로 통일이 된 말은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경우도 많다.

대다수의 사람이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심의를 통해 확정된 표기대로 적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이상일 뿐이다. 전문가들조차 회의해 결정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것이 외래어 표기이다. 쓰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쓰라고 하지 않는 이상 어떤 표기가 맞는 것인지는 사전을 찾아 확인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외래어 표기에 혼동이 많은 것은 표기법의 문제라기보다 가능한 표기가 여럿일 수 있는 외래어 표기의 속성에서 유래하는 문제인 것이다.

시대 흐름에 맞춰 수정 보완하고 개정하는 것이 얼핏 보면 맞는 말 같지만 적어도 표기법에는 이 말이 꼭 맞는 말은 아니다. 말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말이 바뀔 때마다 표기를 바꾸어야 할까. 그럴 수는 없다. 표기가 바뀌면 사람들은 새로 배워야 하고 출판물도 수정해야 하는 등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든다. 영어권에서 영어 표기를 수백년 전에 정해진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결코 그들이 게으르거나 유연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표기를 바꾸는 일은 매우 조심스럽게 극히 보수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오히려 처음에 표기를 정할 때 신중하게 정해서 쉽게 바꾸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립국어원에서도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외래어 표기를 정할 때 여러 사항을 충분히 고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2013-03-04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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