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여경 정책뉴스부 차장
문체반정이 무엇인가. 조선 22대 왕 정조(1752~1800)는 규장각을 만들어 문예부흥을 이끌고, 신분 차별의 벽을 허물었다. 그런데 문체만큼은 정통을 강조했다. 당시 박지원과 같은 진보적 문인들이 청나라 문물에 흥미를 갖고 고답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난 패사소품체를 즐기자 정조는 문풍을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문체반정책을 펼쳤다. 사상의 발로인 글쓰기까지 보수적인 시각을 갖다 대니 사상통제나 문화억압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문체반정에 대해서는 학계의 해석이 여럿이다. 개혁세력 탄압 정책이라는 시각도 있고, 지배층인 노론 세력 견제책, 남인을 향한 천주교 탄압을 피하기 위한 방책 등의 풀이도 존재한다. 배경이야 어찌 됐든 중국 학문에 경도된 이들을 향한 날 선 비판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대뜸 거론된 18세기 조선에서 21세기 대한민국이 떠올랐다. 중국 문체에 쏠린 18세기 조선과 영어에 잠식된 오늘의 한국이다. 우리는 영어를 잘못 쓰면 큰일 날 것처럼 배우면서도 정작 우리말에는 옳고 그름에 참 관대하다. 가장 심각한 오용은 ‘지다’이다. 한 문화재단의 기자간담회가 기억난다. 이 재단 대표는 “사진에서 보여지는”, “호응을 얻을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등이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새로 뚫린 고속화도로에는 이런 표지판이 버젓이 붙어 있다. ‘이 차로는 버스전용차로로 운영되어지는 차로입니다.’ 피동에 수동을 더한, 이런 말도 안 되는 문장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용하는 일이 허다하다.
‘너무’라는 부사도 남발한다.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인데도 좋든 나쁘든 무조건 쓴다. 너무 좋고, 너무 아름답고,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아주, 몹시, 무척, 매우 등 단어가 다양한데도 다 ‘너무’를 갖다 댄다.
국어를 똑바로 사용해야 하는 언론인조차 틀린 문장을 쓰기 일쑤다. 특히 정확한 국어를 구사한다는 아나운서들의 말에도 잘못된 표현이 첨가되고 정작 장단음은 사라졌다.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내놓은 ‘2차 국어발전 기본 계획’을 보면 ‘품위 있는 언어생활을 위한 국민의 창조적 국어능력 향상’이라는 과제가 담겨 있다. 청소년 언어문화 개선도 중요 사업으로 꼽아 놓았지만,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오히려 비속어와 욕설을 사용하는 아이들은 늘었다.
지난 9일 한글날 정부가 국어 사용 장려책을 내놓았다. 그런데 벌써 정부 부처 자료에는 콘퍼런스, 뮤직페어, 힐링 등 영단어가 난무한다. “가장 과학적인 한글”, “우리말이 발전해야 문화가 융성한다”는 말은 며칠 만에 공허한 메아리가 됐다. 국어 훼손의 현실로 따지자면 지금은 21세기형 문체반정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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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5 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