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훈의 간 맞추기] 마틴 루서 킹의 재채기

[유정훈의 간 맞추기] 마틴 루서 킹의 재채기

입력 2019-04-09 17:28
업데이트 2019-04-10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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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훈 변호사
유정훈 변호사
1968년 4월 3일 밤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 청소노동자 파업을 지원하기 위한 집회 연단에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섰다.

“모두가 그러하듯 저도 오래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신의 뜻을 행하기를 원할 뿐입니다. 그리고 신은 제가 산꼭대기에 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위에서 저는 약속의 땅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곳에 들어갈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우리 국민은 반드시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 연설 바로 다음날 거짓말처럼 킹 목사는 숙소에서 암살당했다. 그의 나이는 불과 39세였다.

이 연설 앞부분에 “재채기를 했더라면”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영어 단어 ‘스니즈’(sneeze)에 혹시 다른 뜻이 있나 싶었다. 한참 읽어 본 후에야 문자 그대로 ‘재채기’를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킹 목사가 처음 책을 출판했던 1958년의 일이다. 뉴욕에서 열린 저자 사인회에서 누군가 킹 목사를 칼로 찔렀다. 워낙 깊고 위험한 부위를 찔린 킹 목사는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담당 의사는 킹 목사가 그 상태에서 재채기만 살짝 했더라도 칼이 치명적 부위를 건드려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킹 목사는 수많은 위문 편지 중 기억에 남는 내용을 소개한다.

“킹 목사님, 저는 고등학생입니다. 중요한 건 아니지만, 백인 여학생이에요. 신문에서 사건 소식을 보았고, 그때 재채기만 했더라도 죽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읽었습니다. 목사님이 재채기를 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킹 목사는 결과적으로 생애 마지막이 된 연설에서 자신의 목숨이 재채기 한 번에 달렸던 순간을 회고한 것이다. 그는 민권운동으로 미국과 세계를 바꾸었다.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인물이지만, 우리는 모두 그에게 빚을 졌다. 그의 ‘버밍엄 감옥에서의 편지’에 나오는 말처럼 ‘어디에선가 자행되는 불의는 다른 모든 곳에서 정의에 대한 위협’이기 때문이다. 초인적인 의지로 세상을 바꾼 거인의 목숨이 고작 재채기 한 번에 달렸었다니. 민권운동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기에 결국 성과를 거두었겠지만, 킹 목사가 그때 재채기를 했더라면 그 길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킹 목사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다. 대통령 탄핵까지 이어진 국정농단 사태, 현재진행형인 버닝썬 사건만 해도 본질과는 관련 없어 보이는 일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많은 사람이 힘써 이루어 낸 일이지만, 돌이켜 보면 그런 결과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일 또한 개입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불의한 일은 끊이지 않고, 때로 그 앞에 무력함을 느낀다. 하지만 킹 목사가 즐겨 인용했던 ‘윤리적 우주의 포물선은 길지만 정의를 향해 굽어 있다’는 말을 떠올리며 드러나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을 계속해야겠다. 그 과정에서 킹 목사가 하필 그때 재채기를 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작고도 큰 행운이 종종 일어나길 기대하며.
2019-04-10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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