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도토리묵과 붉은 단풍/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열린세상] 도토리묵과 붉은 단풍/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입력 2013-11-05 00:00
업데이트 2013-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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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끝자락이다. 내가 근무하는 대학 교정에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삼각숲’이 있다. 요즘 그곳에는 단풍이 한창이다.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붉은 단풍을 보니 “‘오매, 단풍 들것네’/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라는 영랑의 시가 떠오른다. 붉은 단풍과 하나가 되어 얼굴을 붉히는 누이의 청초한 모습에 절로 미소가 우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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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그런데 붉은 단풍이 2050년쯤이면 한반도에서 사라진단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밤 기온이 점차 오르면서 화사한 붉은빛의 단풍은 그 빛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단풍을 두고 만산홍엽(滿山紅葉)이라 했거늘, 머지않아 이 단어도 사라지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가을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며칠 전, 삼각 숲에서 유치원생들이 도토리를 줍는 것을 보았다. 엄마가 도토리묵을 만들어 줄 테니 도토리를 주워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내가 다람쥐는 뭘 먹고 사느냐고 묻자 아이들은 ‘도토리요’라고 한다. 그럼 도토리를 다 주워가면 다람쥐는 뭘 먹느냐고 묻자, 아이들은 ‘몰라요’하면서 나를 흘낏 한 번 째려보고서는 저만치 가버린다. 자식에게 맛있는 도토리묵을 만들어주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다람쥐와도 공존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올바른 교육 아니겠는가.

환경 관련 학회에서 들은 강연 내용이 생각난다. 사람의 발 힘이 너무 세서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을 보호하기 위해 등산로를 지정하고, 또 나무 산책로도 만든다는 것이었다. 내가 사는 마을 뒷산에 오를 때마다 지정된 등산로를 벗어나 걷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본다. 부득부득 등산로 아닌 길로, 나무 계단 옆길로 오른다. 그래서 푸릇한 산에 생채기가 나고 비가 오면 토사가 흘러내린다.

사람이 다람쥐, 산과 공존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하긴, 내 편 아니면 적이라는 생각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공존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람과 자연, 보수와 진보,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가진 이와 가지지 못한 이, 힘 있는 이와 힘없는 이가 서로를 이해하고 상호 발전적인 관계를 맺을 수는 없는 것일까.

김원우의 소설 ‘산비탈에서 사랑을’을 보면 백두대간 종주와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주인공은 종주하면서 사람에 의해 도처에 훼손된 산을 보며 분노한다. 그러면서 산 아래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애인을 대하듯이 그렇게 산을 사랑하고, 그런 산과의 사랑을 통해 애인과의 사랑을 더 깊고 넓게 만들어 간다.

방현석의 소설 ‘랍스터를 먹는 시간’에는 베트남의 어느 시골길에서 차가 물소 떼에 가로막혀 지나가지 못하는 장면이 나온다. 베트남인은 원래 그 길을 만든 건 물소 떼라고 하면서, 인간이 어떻게 물소 떼에게 길을 비키라고 경적을 울릴 수 있느냐고 한다. 그리곤 물소 떼가 지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 베트남인은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생활에서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나’였다면 경적을 울리면서 난리를 쳤을 것이다.

나를 째려보던 아이들의 모습이 김영랑 시 속 누이의 모습에 겹쳐지는 것은 왜일까. 공존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아이들에게서 더 이상 청초한 누이의 모습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아니, 그 아이들에게서 공존의 미덕을 잃어버린 기성세대로서의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저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만들어 나갈 한국 사회를 떠올리니 그저 암담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 주범이 나 자신이라 생각하니 기성세대로서 그들에게 너무도 큰 죄를 짓는 것 같다.

경제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려야 인간으로서의 품격이 갖추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토리묵보다는 다람쥐를 생각하고, 자신만의 등산로를 만들기보다는 산을 애인처럼 사랑하고, 물소 떼가 만들어 놓은 길을 사람이 잠시 빌려 쓴다는 마음을 가질 때 인간으로서의 품격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사회 내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첫 출발점이 바로 이 품격의 자리가 아니겠는가.

2013-11-0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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