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만에 장편 ‘홀리모터스’ 찍고 방한 천재감독 레오스 카락스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만큼 충격적인 데뷔작도 드물 터다. 천재감독에겐 미안할 만큼 낡은 표현이지만, 혜성 같았다. 당시 레오스 카락스( 53)의 나이 스물넷. 열여섯에 학교를 그만두고 열아홉부터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기고를 했다지만, 신인의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나쁜 피’(1986), ‘퐁네프의 연인들’(1991)로 이어지는 카락스의 작품은 1980~90년대 영화학도와 시네필을 추종자로 포섭했다. 하지만 1999년 남매 간의 사랑이란 설정으로 논란을 빚은 ‘폴라X’를 끝으로 더 이상 장편을 찍지 못했다.

레오스 카락스<br>연합뉴스
13년 만인 지난해, 그는 칸영화제에 ‘홀리모터스’를 출품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가 ‘홀리모터스’를 2012년 최고 영화로 꼽은 건 자국 출신 거장에 대한 예우는 아니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부터 호흡을 맞춘 카락스의 페르소나, 드니 라방이 1인 11역을 소화한 ‘홀리모터스’는 걸작으로 손색이 없다. 첫 장면은 영화관을 가득 메운 관객들로 시작된다. 죽었는지 잠을 자는지 모두 눈을 감고 있다. 그 광경 위로 ‘홀리모터스’란 제목이 나타난다. 그제야 영화는 하루에 아홉 개의 삶을 사는 주인공 오스카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아침에 눈을 떠 리무진을 타고 출근길에 올라 정해진 일정에 따라 걸인, 모션캡처 전문 배우, 광인, 아버지, 아코디언연주자, 킬러, 죽어가는 남자 등의 삶을 산다. 관객은 오스카의 직업이 배우일 거라 생각할 듯싶다.

카락스가 2009년 이후 4년 만에 한국에 왔다. 되는 대로 쓸어넘긴 반백의 머리는 여전했다. 조금 야위었고, 여전히 진지했고, 골초였다. 카락스는 4일 서울 봉래동 프랑스문화원에서 13년 만에 장편을 찍은 이유에 대해 “공백이 길어진 건 금전적인 이유 때문이다. ‘퐁네프의 연인들’, ‘폴라X’를 찍을 때에도 제작비에 쪼들렸다. 물론 여유가 있더라도 다작을 할 사람은 아니다. 그래도 9~10편쯤은 찍지 않았을까”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비슷한 영화를 찍고 싶지는 않다. 삶의 다양한 면, 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 때론 삶의 피곤함을 느낄 때가 잦은데 그 피곤함을 극복하게 하는 원동력이 영화”라고 덧붙였다.

4편(옴니버스 ‘도쿄’ 중 ‘광인’을 포함하면 5편)이나 함께 찍은 라방에 대해 “뭘 요구해도 다 구현할 수 있는 배우”라고 잘라 말했다. 30년을 알고 지냈고 불과 200m쯤 떨어진 곳에 살고 있지만, 사적으론 친하지도 않고 밥도 따로 먹은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현장에선 ‘지음’(知音)이나 다름없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찍을 때 소년 역을 캐스팅하는 데 애를 먹었다. 우연히 구인구직소에서 배우 사진을 보다가 발견했다. 희한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발전하는 관계가 됐다. ‘홀리모터스’에서 두 가지 역은 정말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해냈다. 점점 좋은 배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카락스는 “디지털 기술이 너무 발달하면서 (영화인도) 점점 의존하고 있다. 그래도 영화 초창기의 원초적 힘을 난 믿는다. 무르나우(1889~1931)의 영화를 보면 카메라에서 흡사 신의 눈길이 느껴진다. 나도 다시금 신의 눈길을 찾고 싶다. 젊은 영화인들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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