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난 비밀, 떠난 남자들… 아직 최악이 아니다?

유독 일진이 나쁜 하루가 있다. 원하는 쪽으로는 전혀 풀리지 않고, 원하지 않은 쪽으로만 잔뜩 꼬이는 상황. 그렇지만 그런 날에도 “최악의 하루”라는 표현은 신중하게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보다 더 지독한 일이 내일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최상급 수식어는 지금까지 자신의 경험을 통틀어 딱 한 번 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가령 ‘최선’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쓴 시가 있다.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 아무렇지도 않게 / 몸이 몸을 버리지요 //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이규리, ‘특별한 일’)

이규리 시인의 최선이 그런 것이라면, 김종관 감독의 최악은 이런 것이다. 그 하루는 배우 지망생 은희(한예리)의 입장에서 그려진다. 연기 수업을 마치고 그녀는 남산에 간다. 그곳에서 드라마 촬영 중인 남자친구 현오(권율)를 만나기 위해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사랑을 속삭이는 대신 티격태격하다 토라진다. 은희로서는 그럴 만했다. 다른 여자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애인이라니. 그렇게 돌아서서 걷던 그녀 앞에 운철(이희준)이 나타난다. 예전에 은희와 한동안 사귀던 남자다. 남산에서 그녀가 올린 트위터 멘션을 보고 무작정 찾아온 것이라고 하는 운철. 얼핏 로맨틱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의 궤변을 들으며 은희는 겨우 화를 삭인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한 가지 사건이 더 발생하면서, 제목대로 그녀는 ‘최악의 하루’를 맞게 된다. 현오와 운철이 대면해 은희의 비밀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사실을 알게 된 과거와 현재의 남자는 같이 떠나버린다. 모른 척, 그녀는 홀로 남는다. 이 정도면 은희의 처지에서 최악의 하루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원래 영화 제목인 ‘최악의 여자’―그녀가 자초한 불행이라고 해도 그렇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은 서로에게 내재해 있다. 행불행이라는 단어가 있듯, 행복과 불행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은희가 겪은 최악의 하루가 정말 최악의 하루로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제야 이야기하지만 ‘최악의 하루’에는 현오와 운철 외에 한 명의 남자가 더 등장한다. 출간 기념회차 한국을 방문한 일본 작가 료헤이(이와세 료)다. 그는 은희만큼이나 최악의 하루를 보냈다. 영화 서두에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은 영화 말미에 다시 조우한다. 은희와 료헤이는 오늘 마주한 문제를 구구절절 털어놓지 않는다. 그저 같이 남산 산책로를 걸을 뿐이다. 은희는 춤을 추고 료헤이는 자기 소설에 대해 말한다. 그래서 그들의 하루는 최악으로 끝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영화 도입부 료헤이의 내레이션을 떠올린다면, 어쩌면 그가 창조한 픽션을 그녀가 연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계는 하나의 무대, 모든 사람은 배우’. 이런 오래된 명제를 따르는 이들에게 최악의 하루는 최선의 하루와 다르지 않다. 25일 개봉. 15세 관람가.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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