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지나서야 묘비명 얻은 타이타닉 생존자

90년 지나서야 묘비명 얻은 타이타닉 생존자

입력 2013-06-28 00:00
업데이트 2013-06-2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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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514명이 한밤중 빙산에 부딪친 여객선과 함께 얼음같은 대서양으로 사라진 1912년 타이타닉 대참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운좋고 강인했던 사람도 어쩔수 없었다.

타인타닉호를 타고 미국으로 이민가던 스웨덴 사람 오스카 팜키스트는 당시 비극을 면할 수 있었지만 10여년 후 거주지 부근의 얕은 저수지에서 사체로 발견됐다.

그는 이후 공동묘지에서 비석도,묘석도,아무런 표식도 없는 무덤에 묻혀 있어야했다.

유족들이 이 조차 마련할 길이 없었던 탓이다.

타이타닉 대참사에서도 살아남았던 그 이름을 사후 90년 가까이 자신의 무덤에 내 걸 수 없었던 그가 드디어 망자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얻게됐다.

타이타닉호 관련 각종 연구와 기념사업을 하는 비영리단체 타이타닉국제협회(TIS)는 팜키스트의 무덤에 이번 주 그의 비석을 세워준다.

TIS의 셸리 지에지치 명예회장은 27일 전 세계에서 모금한 소액기부금 2천여달러를 들여 그의 비석을 세우기로했다고 전했다.

지에지치는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지지 않은 채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방치된 것은 부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팜키스트의 종손(從孫)인 데이비드 팜키스트는 TIS에 대해 “정말 훌륭하신 분들”이라면서 “비석을 세울 수 없어 잊혀질 처지에 놓인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있다”고 감탄했다.

팜키스트는 당시 3등선실 승객으로 스웨덴 이름인 요한손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으며 형이 사는 코네티컷주로 이민오던 길이었다고 친척들은 전했다.

그는 허리에 구명 재킷 두개를 두르고 타이타닉호 침몰의 마지막 순간에 얼음물 같은 바다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여객선 특실의 문짝 하나에 의지해 물에 떠있다가 가까스로 구명보트에 다가간 그는 구명보트가 뒤집힐 것을 우려한 누군가가 내려친 노에 맞았다.

이때 한 스웨덴 소녀가 자신이 숄 한쪽 자락을 그에게 던져줘 구조 선박이 올때까지 버틸 수 있도록 했지만 이 소녀는 결국 추위를 견디지 못해 죽었다고 한다.

당시 뉴욕에서 발행되던 욘커스 헤럴드지는 팜키스트의 형이 전해준 대로 이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데이비드 팜키스트는 이 보도 내용이 자신이 친척들에게 전해 들은 내용과 거의 같지만 소녀의 숄 대목에 대해서는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팜키스트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뒤집힌 구명보트까지 헤엄쳐갔을 것으로 생각되며 소녀도 함께 헤엄쳤을 수 있다고 추측했다.

이후 13년이 지나 팜키스트가 직장 동료와 싸우고 함께 해고될 당시 그는 기계기술자였다.

지에지치와 친척들은 당시 팜키스트가 동료의 부인과 관계가 있었다는 소문이 있다고 말했다.

1925년 3월27일 팜키스트는 가장 좋은 옷으로 차려입고 동네 이발소에 들러 면도를 한 후 시내에서 하룻밤을 보내기위해 전차를 타러갔다.

이것이 그가 생전에 목격된 마지막 장면이었고 몇주 후 동네 저수지에 떠 있던 그의 시체가 발견됐다.

경찰은 그가 실족해 익사한 사고사로 단정하고 부검도 실시하지 않았다.

유족이나 주변 사람들은 타이타닉 참사이후 팜키스트가 극도로 물을 두려워했다며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친척들은 당시 팜키스트의 폐에 물이 차있지 않았으며 시신의 상태도 물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야외에 놓여있었던 것 같다고 장의사가 말했던 것으로 전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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