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이 ‘모두까기 인형’이 될 수 있는 단 하루.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

미국 대통령이 ‘모두까기 인형’이 될 수 있는 단 하루.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

박기석 기자
박기석 기자
입력 2016-04-29 15:27
업데이트 2016-04-29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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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한 번 미국 대통령이 개그맨으로 변신하는 날이 있습니다.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이 열리는 날입니다. 매년 4월 마지막 토요일에 개최되는 이 행사에는 대통령이 참석해 정치 풍자로 버무려진 연설을 합니다.

올해는 오는 30일(현지시간)에 열리는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마지막 만찬 연설이라 지난 임기 8년 간의 소회를 ‘센’ 멘트로 풀어나갈 것으로 보여 기대가 큽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큰 웃음’ 주기 위해 파격적인 시도를 할지도 모릅니다.

대통령은 만찬장에서 자신부터 시작해서 여·야 정치인, 만찬장에 참석한 기자와 유력 정·재계 인사 등을 무차별로 풍자하며 ‘모두까기 인형’이 됩니다. 특히 대통령의 ‘자기 비하 개그’가 제일 화제가 됩니다.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은 언제부터 ‘개그콘서트’가 됐는가?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의 역사는 8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백악관 출입기자들은 1914년 백악관의 언론 담당 부서에 단일대오를 이뤄 대응을 하기 위해 백악관출입기자협회를 조직합니다. 협회는 회원 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1920년 처음 만찬을 열었고 4년 뒤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캘빈 쿨리지가 만찬에 참석합니다. 이후 당선된 모든 대통령은 임기 중 1번 이상 만찬장을 찾습니다.

초기의 만찬은 대통령, 대통령 비서, 출입기자, 소수의 초청인사 등 50여명이 모여 가벼운 축하공연을 즐기며 식사를 하고 친목을 다지는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만찬장에서 가진 연설에서 자신의 유머 감각을 유감없이 드러내면서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은 본격적인 ‘정치 풍자쇼’로 탈바꿈합니다.

●1962년 만찬, 존 F 케네디 대통령

“저는 최근 팜비치(공화당 강세지역)를 방문하고 워싱턴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민주당 정책은 모두 폐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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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에서 연설하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자료=존F케네디대통령도서관
1962년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에서 연설하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자료=존F케네디대통령도서관
팜비치가 있는 플로리다주는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곳입니다. 민주당 출신의 케네디 대통령이 팜비치에 방문해서 느꼈던 자신과 자신의 당에 대한 비판과 적대감을 이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이후 후임 대통령들은 케네디 대통령의 ‘유머 유산’을 뛰어넘기 위해 더 센 멘트를 구상하고 ‘비장의 카드’를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저는 여러분께 작은 조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옆 사람이 빨리 차에 타라고 하면, 당장 그렇게 하세요! 여러분의 목숨은 소중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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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3월 30일 미국 워싱턴 힐튼호텔 앞에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겨냥한 총격이 발생하자 주위가 아수라장이 됐다. 오른쪽에는 레이건 대통령의 전용 리무진이 서있는 모습. 자료=로널드레이건대통령도서관
1981년 3월 30일 미국 워싱턴 힐튼호텔 앞에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겨냥한 총격이 발생하자 주위가 아수라장이 됐다. 오른쪽에는 레이건 대통령의 전용 리무진이 서있는 모습. 자료=로널드레이건대통령도서관
레이건 대통령은 1981년 만찬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 했습니다. 한 달 전 워싱턴의 힐튼호텔에서 연설을 마친 레이건 대통령이 호텔 정문을 빠져나와 대통령 전용차로 오르던 도중 정신이상자가 쏜 총에 맞아 쓰려졌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총알이 심장을 빗겨나가 목숨은 건졌지만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는 관계로 만찬에 참석하지는 못 했습니다. 하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수화기 너머 목소리로 만찬장에 등장해 이같은 ‘드립’을 치며 청중들을 즐겁게 합니다.

●1988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사람들은 제가 집중력이 약하다고 공격해왔습니다. 자! 이제 제가 반격할 차례입니다! .......(응?) 됐습니다. 넘어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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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에서 연설하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자료=로널드레이건대통령도서관
1988년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에서 연설하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자료=로널드레이건대통령도서관
재임 당시 미국 최고령 대통령이었던 레이건은 임기 내내 자신의 건강에 의문을 제기하는 정치 공세를 겪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를 ‘자기 비하 개그’로 응수하며 자신의 건강에 관한 논쟁을 ‘별 것 아닌’ 문제로 만듭니다.

●1991년 만찬, 조지 H W 부시 대통령

“백악관 입성 전 저의 즐거움 중 하나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계산대 줄을 기다리며 찌라시 신문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못 해 아쉽네요. 아! 그래도 제겐 뉴욕타임스가 남아 있습니다.”

●1994년 만찬, 빌 클린턴 대통령

“월스트리트저널이 제 부인의 선물 거래 투자를 비판했다는데... 낚시 전문 잡지 필드앤스트림이 물고기 잡는 것을 비판하는 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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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에서 가수 아레사 프랭클린(오른쪽)이 축하공연을 마치자 빌 클린턴 대통령이 일어나 박수를 치고 있다. 자료=윌리엄J클린턴대통령도서관
1999년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에서 가수 아레사 프랭클린(오른쪽)이 축하공연을 마치자 빌 클린턴 대통령이 일어나 박수를 치고 있다. 자료=윌리엄J클린턴대통령도서관
미국 대통령과 대통령 비서들은 기자들의 매서운 질문공세와 날카로운 비판기사로 365일 내내 시달립니다. 하지만 이날 만큼은 대통령이 마음껏 기자들을 풍자하며 복수할 수 있습니다. 친(親)시장적인 월스트리트저널이 부인의 정당한 금융 투자를 비판한 데 대해 클린턴 대통령은 마치 낚시 전문잡지가 낚시 행위를 비판하는 것과 같다며 일침을 날립니다. 보수 공화당 출신의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대표적 진보매체인 뉴욕타임스가 자신에겐 찌라시 신문과 같다며 한(?)이 서린 농담을 합니다.

●2000년 만찬, 빌 클린턴 대통령의 ‘마지막 나날’(The Final Days)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해인 2000년 만찬장에서 자신의 임기 마지막 날들을 가상으로 꾸민 영상을 틀었습니다. ‘마지막 나날’(The Final Days)이라는 제목의 이 영상은 정치권과 언론의 모든 관심이 그 해 대통령선거에 쏠려있어 클린턴 대통령이 주목받지 못 하는 ‘레임덕’ 상황을 풍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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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이 연설하던 도중에 상영된 ‘마지막 나날’(The Final Days) 영상. 자료=윌리엄J클린턴대통령도서관
2000년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이 연설하던 도중에 상영된 ‘마지막 나날’(The Final Days) 영상. 자료=윌리엄J클린턴대통령도서관
영상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백악관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갖지만 회견장에는 기자 1명만 앉아있고 그나마 졸고 있습니다. (이 기자는 미국 최초의 여성 백악관 출입기자인 헬렌 토마스입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백악관 정원에서 잔디를 깎고, 세탁기를 돌리고, 이리저리 백악관을 돌아다니며 무료한 일상을 보냅니다. 압권은 그 해 뉴욕주 상원의원 후보로 출마해 선거 운동으로 바쁜 부인 힐러리 클린턴마저 부인의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는 자신을 버리고 검은 리무진을 탄 채 백악관을 떠나는 장면입니다.

●2005년 만찬,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부인 로라 부시 여사

“남편은 항상 만찬에 참석해서 즐겁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남편은 이 시간에 항상 잠에 들거든요. 저는 종종 남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조지, 독재자들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싶으면 일단 잠을 줄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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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에서 조지 W 부시(왼쪽) 대통령 대신 연설에 나선 부인 로라 부시(오른쪽) 여사. 자료=C-SPAN 공식 홈페이지
2005년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에서 조지 W 부시(왼쪽) 대통령 대신 연설에 나선 부인 로라 부시(오른쪽) 여사. 자료=C-SPAN 공식 홈페이지
대통령은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서 부인까지 등장시킵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부인 로라 부시 여사는 2005년 만찬에서 ‘깜짝 연설’을 갖고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명명하는 등 비(非)민주국가에 대해 호전적인 자세를 취한 것을 풍자합니다. 부시 정권은 9.11 테러에 관여하고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독재정권인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력으로 무너뜨린 바 있습니다.

●2014년 만찬, 버락 오바마 대통령

“푸틴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미친 소리라고 생각합니다만... 하긴 요즘은 아무한테나 노벨평화상을 주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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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에서 연설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자료=백악관 공식 홈페이지
2014년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에서 연설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자료=백악관 공식 홈페이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14년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강제 합병해 국제적으로 비판을 받았지만 그 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 사실을 풍자하면서도 자기 자신도 풍자의 제물로 삼아 청중들의 폭소를 이끌어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임기 첫 해인 200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는데, 국제 평화에 아무런 기여한 바 없이 상을 받았다며 많은 비난과 조롱에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2015년 만찬, 버락 오바마 대통령

“미국 국민의 미래는 매우 불확실합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1년에 수백만 달러를 벌던 제 친구는 지금 승합차에서 숙식하며 아이오와주에서 거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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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연설하기 전 상영된 개그 영상 중 한 장면. 자료=백악관 공식 홈페이지
2015년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연설하기 전 상영된 개그 영상 중 한 장면. 자료=백악관 공식 홈페이지
현재 민주당 유력 대선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2016년 대선 경선이 처음 열리는 아이오와주에서 지난해부터 선거 유세를 하고 있었습니다. 클린턴 전 장관은 친(親)기업적이며 부자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서민적인 승합차를 타고 아이오와주를 돌고 있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같은 민주당 출신이자 자신의 내각에서 국무장관을 맡았던 클린턴이 ‘서민 코스프레’를 한다며 꼬집은 것입니다. 풍자 대상에는 내편 네편도 없는 모양입니다.

레이건과 아들 부시 대통령의 만찬 연설 작성을 도왔던 랜든 파빈은 “만찬은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반면 비교적 부담없는 자리에서 기자들이 대통령에게 현안을 묻고 대통령은 자신의 의견을 밝히던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이 백악관의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나옵니다. 뉴욕타임스는 이에 2008년부터 참석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만찬장에서 ‘자기 비하 개그’와 ‘모두까기 개그’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민들이 대통령과 정치권을 비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대통령은 만찬 풍자 연설을 준비하면서 국민들의 불만을 들여다보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정책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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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후 첫 소통 행보
총선 후 첫 소통 행보 박근혜 대통령이 26일 청와대에서 열린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오찬 간담회에 앞서 배석한 수석비서관들을 일일이 소개하자 옆에 앉은 언론사 국장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이 언론사 보도·편집국장과 오찬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미국의 만찬은 질의응답 없이 대통령의 풍자 원맨쇼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반면, 한국의 오찬에서는 진지한 질의응답이 장시간 이어졌습니다. 그렇다면 국민과의 소통은 어느 쪽이 더 잘 이루어졌을까요?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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