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이름으로”…시진핑 부친 ‘우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시진핑 부친 ‘우상화’

입력 2013-10-15 00:00
업데이트 2013-10-15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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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쉰 탄생 100주년 맞아 집중 조명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부친인 시중쉰(習仲勛·1913∼2002) 전 부총리의 위상이 최근 중국에서 크게 높아지고 있다.

특히 그의 탄생 100주년인 15일을 즈음해 각급 공산당 조직과 관영 언론이 ‘시중쉰 우상화’에 총동원된 모양새다.

국영 중국중앙(CC)TV는 14일부터 시중쉰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기 시작했다.

6부작인 이 다큐멘터리는 하루 2편씩, 16일까지 사흘 연속 황금시간대인 오후 8시에 방영된다.

이 프로그램은 시중쉰이 마오쩌둥(毛澤東)을 도와 사회주의 중국 건국에 이바지한 혁명가이자 덩샤오핑(鄧小平)의 조력자로서 개혁개방 정책 실천에 앞장선 선구자로 그린다.

시중쉰의 피를 이어받은 시 주석이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정치적 자산을 동시에 물려받았음을 은연중에 부각시키는 전략으로 읽힌다.

출판 분야에서도 시중쉰 조명 열기가 뜨겁다.

중국문헌출판사는 지난 8월 시중쉰 전기 하권을 펴냈고, 최근에는 공산당 차원에서 시중쉰 문집, 시중쉰 화첩 등이 동시에 쏟아져나왔다.

아울러 국공내전과 항일전쟁 당시 시중쉰의 활동 거점이던 간쑤성을 비롯한 산시(陝西), 광둥성 등지에서는 지방정부나 민간 주최 형식으로 시중쉰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가 잇따라 개최됐다.

부총리까지 지낸 시중쉰은 중국의 8대 혁명 원로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러나 아들인 시 주석이 최고 지도자로 등극하기 전까지는 그리 크게 주목받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부총리까지 지냈지만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1962년 ‘반당 분자’로 몰려 실각했다.

16년 동안이나 옥고를 치르고 마오쩌둥 사후인 1978년에야 덩샤오핑의 도움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이후 시중쉰은 ‘개혁개방 1번지’인 광둥성에 부임, 보수 세력의 강력한 견제 속에서 개혁개방 정책을 성공리에 정착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중쉰을 대대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집권 초기인 시 주석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보인다.

특히 ‘개혁개방 심화’를 주제로 한 중요 정치적 이벤트인 18기 3중전회(중국공산당 18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가 내달 개최될 예정인 가운데 시 주석을 포함한 지도부가 개혁개방의 기수였던 시중쉰의 탄생 100주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중국 내 일각에는 집안의 ‘혁명 내력’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세습 정치를 연상케한다는 점에서 우려 섞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아울러 이전까지는 조용하던 언론과 공산당 조직이 시 주석의 취임 이후에야 비로소 그의 부친을 요란스럽게 띄우는 것은 볼썽사나운 아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도 나온다.

누리꾼 ‘쑤이이(隨憶)’는 포털 텅쉰 게시판에서 “CCTV의 시중쉰 다큐멘터리 방영이 너무 늦은 것 같다”고 비꼬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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