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방 국치일 잊은 듯… 한민족은 건망증인지?”

“한일합방 국치일 잊은 듯… 한민족은 건망증인지?”

입력 2011-02-28 00:00
업데이트 2011-0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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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일기’ 살펴보니

백산 지청천의 자유일기는 1951년 새해 첫날부터 숨을 거두기 직전인 1956년 12월 11일까지 6년간의 파노라마다. 백산과 이승만은 자유일기를 통해 여러 차례 만났다.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은 내용들이다. 백산은 이승만 정부의 부패상을 비판했다. ‘금반 국정감사의 보고를 보면 각 부처의 과오가 산적, 오리탐관은 만천하에 충만, 비민주적이 비일비재, 법망은 해이, 백유천창(百乳千創)이다.…제2 장개석 정부의 답습으로서 그 이상 부패하였으니 신생 국민으로서 기초가 건강하지 못한 데다 지극히 전쟁 참화를 입고 있는 차제에 어떻게, 어디서부터 수술을 가하여야 할지?’라고 우려했다. 이어 이승만의 용인술도 비판했다. ‘도대체 정치는 인(人)이 운영하는 것인데, 우리 헌법이 잘못된 것을 알았고, 또 대통령의 용인법이 애국자, 혁명가, 거물급을 기피, 절대 불등용하는 데 기인됨을 세인이 계지하는 바이다.…피치자인 국민은 선량 충용한데 치자인 관리가 거개 무능 탐오, 더구나 군경의 발호와 각종 특수 단체의 권력 남용 및 민폐이다.’(자유일기 1951년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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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서울신문을 통해 공개된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6년간(1951~1956년) 육필 기록인 자유일기. 당시의 정치상황과 경제적 양극화를 우려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27일 서울신문을 통해 공개된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6년간(1951~1956년) 육필 기록인 자유일기. 당시의 정치상황과 경제적 양극화를 우려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만주 등지에서 항일운동 전면에 나섰던 독립운동가가 본 국치일에 대한 소회도 남겼다. ‘국치기념일…우리가 해외에서는 년년히 이날을 기념할새 조석반을 굶고 적개심을 고취하였건마는 국내에 와서 보니 차일에 대한 일반의 무심함을 보고 통함됨을 불금하노라. 대한민국의 반부강산이 독립되었다고 해서 그러한지 일본과 장래 친교하기 위하여 구태여 감정을 사지 않으려고 함인지? 통정사통(痛定思痛)이라 정부의 방침으로도 이날에 일본제국침략주의와 군국주의의 착오와 잔인을 일반 인민에게나 일본인에게 알려야 한다.’(〃1951년 8월 29일). 그러나 일년 뒤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백산은 이런 시대상을 개탄했다. ‘금일은 한일합방의 국치 기념일이다. 조야 각계가 이날을 잊은 듯 관청은 물론 각 학교도 하등 기념 행사가 없으니 한민족은 건망증인지?…오늘의 반부(半部) 강산의 독립이 우연히 요행에서 얻어지지 않은 것을 알고 선열을 더욱 추모하고 일제의 법률하에 생활을 부인하는 상징으로서 상해임시정부의 민족 정기 앙양의 큰 공적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1952년 8월 29일)고 기록했다.

노동 문제에 대한 진보적인 시각은 이채롭다. 전문가들조차 선진적이라고 해석한다. 당시 임시정부의 경제정책을 지지했던 백산의 시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노동신성인데 금일은 노동자의 날이다. 전 세계 노동 문제, 노동자의 복리 보호 등등이 전 세계 중대한 사회문제이며 세계 평화의 관건이다. 이것을 잘 처리하는 자는 금일의 능한 정치가일 것이다.’(〃 1952년 5월 2일)

제2대 대통령 취임 연회를 ‘사치’로 규정한 대목에서는 이승만과 각을 세운 백산의 결기가 담겨 있다. ‘(대통령 취임식) 오후 2시에 경회루에서 연회가 있었지만 불참하다. 만민이 기아지경에 삼십억원(圓) 비용을 들여서 서울에서 거행함은 찬성할 수 없으며, 호화롭다.’(〃1952년 8월 15일)라고 질타했다. 이승만 정부에서 독립운동 출신의 군 간부들이 밀려나는 데에도 아쉬움과 함께 비판적 인식이 담겨 있다. ‘장두관대령(102사단장)의 제4녀 결혼식에 주례하다. 장두관은 1920년 홍범도 장군의 정일군의 소대장으로 있다가 일구쓰크시 고려혁명군사관학교에서 나의 교장하에서 수훈한 제자이다. 200명 학생 중 병사 전서 등 희생자가 불소한 중 생존한 장대령은 시종 변절치 않고 사제로 의를 지키고 광복청년회 등 중요 간부로 있었고 금년 49세의 우수 분자인데 배경 관계로 장관(將官)급에 승진치 못하고 수년관 영관으로 노무사단장직에 복무 중인 인물이니라.’(〃1952년 11월 26일)라며 안타까워했다. ‘오광선 대령이 방래하였다가 내가 부재함으로 퇴거하려는 차에 만나서 서로 반기며 정을 나누다. 오 대령도 나이 50여세에 장(將)줄에 승급 못 하고 속초 신설 노무여단장의 직에 있으며 설운 사정을 진술하더라.’(〃1953년 9월 4일)

광복에 대한 기쁨과 독립운동을 함께 한 동지들의 서거를 침통해하는 모습도 절절하게 녹아 있다. ‘금일은 악랄한 일제 패망 투항한 날, 우리 민족이 해방된 지 8년째의 날, 대한민국이 건립된 지 만 5년째의 날이다. 아, 감개가 무량이다. 독립운동에 같이 종사하던 영수급이 거개 별세하였다. 여를 지극히 경애친신(敬愛親信) 하던 서일 김좌진 홍범도 김동삼 김오석 이동녕 이시영 양기탁 손회당 김백범 김추당 최중산 이춘정 이우정 최관용 문창범 등 노소 전후배가 불가승수라. 나 일인만 고독히 남아서 더 고생하여 우수 사려에 주름살이 늘어가고 있도다.…건국사업에 심중 포부를 펴지 못하고 답답한 기일을 허송하는 금일의 신세여. 남북통일의 방법은? 사상통일의 방법은? 민생고 해제의 처방은? 민주주의의 발전은? 정부 입법 사법 등 국민과의 단결은? 진정한 부국강병은? 세계 일가의 구현은 언제인가? 설마 생전에 그때가 오겠지!’(〃1953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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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우익 독립운동가로 분류되는 백산이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옹호한 점은 눈에 띈다. ‘헌법 중 경제에 관한 건으로 정부 측으로부터 제출되어 이미 공포한 지 월여에 금일 장정 질의전이 시작되었는데 찬성자 극소. 우리 헌법은 경제에 관하여 세계 대조류에 순응하여 사회주의적 경제 체제를 취하였던바 현 정부에서는 자유경제 체제를 취하려는 것인데 원칙상 시대 위반이고 아국의 부흥 재건과 전쟁 추진 등을 위하여서도 통제경제의 방침을 취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여사한 개헌을 시도하자는 이면에는 혹은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취하여 외자 도입을 유도하려거나 혹은 미국 측 원조를 순조로히 속독(速得)하자는 목전 필요감에서 나오는 정책적 변경이 아닌가 추측된다.’(〃 1954년 2월 25일)

제헌의원과 2대 의원을 지낸 백산은 3대 총선을 앞두고 심각한 고민을 했음이 자유일기에 쓰여 있다. 그는 결국 불출마했다. ‘5·30 총선거에 출마를 포기…1. 나는 첫째 6년간 국회의원 생활에 염증이 났소. 모략을 모르고 협잡을 체득지 못한 우리 무인으로서 좀처럼 지탱하기 어려운 생활이오. 2. 둘째 후진에 양보함으로써 보다 참신한 민주정치를 기대하고 싶은 마음이오. 3. 셋째 솔직한 고백인데 선거 비용의 조달이 막연한 것. 4. 나의 일평생의 목적은 국가의 완전 자주독립이요, 민주정치 도의정치의 구현이었소. 그러나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양심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이놈의 ‘노름’이란 말이야. 5. 당년 67세의 노군략(軍略) 정치가로서 6년의 국회 생활을 회고하면서 뚜렷하고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함을 국민 앞에 사과할 뿐….’(〃1954년 5월 1일). 궁핍한 국민과 달리 호사스럽게 사는 소수층을 비판하며 양극화 해소를 밝히는 대목에서는 선각자로서의 백산을 떠올리게 한다. ‘늦추위가 시작하여 동지 이후로 한기가 심하더니 작금에 영하 십사도 팔분에 지하여 한강도 결빙하고 생활고에 허덕이는 궁민(窮民)은 여러 가지 곤란을 당하고 있다. 고루거각에 스팀에다가 호사하는 층에 비하면 차이가 많다. 국민 거개가 최저 생활의 균형을 누리는 세상이 되어야지!’(〃1955년 1월 7일)

타계하기 1년 5개월 전 병마가 이미 찾아 왔음을 느끼게 하는 내용도 있다. ‘금일은 8월 29일 국치 기념일인데 국내에 있던 동포들은 무관심하고 대통령부터도 이날을 이용하여 국민에게 8월 29일 망국의 원인 결과 및 통념(痛念)을 환기시키며 사유(四維)를 교도할 생각을 아니하고 있으니 역사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도록 훈련해야 되겠는데 걱정이다. 요사이는 숨찬증도 쾌히 낳고 구미도 돌아서 식사도 상당하니 다행이다.…하나님의 보호와 조상의 음덕으로 금년 68세 죽어도 아깝지 않은 연령인데 또 살아나니 아마도 남은 독립운동을 완성하라는 뜻인 듯.’(〃1955년 8월 29일). ‘금일은 야소 탄생일이다.…우리 남북전쟁으로 인하여 미군이 래주한 이래 수년간에 이날을 성대히 기념하는 행사가 경향 각지에 저절로 성행하게 되었다. 야소교는 한때 만났다. 미국 측에서 교인에게 특별히 우선적으로 피난도 시키고 원조물자도 후히 분배해 주었고 보조 후원을 많이 하여 교당 건립이 도처에 세워지게 되었다. 좋은 현상이나 그러나 목사급에 협잡군이 적지 않고 전자에 친일파로 유명하던 목사들도 또한 금일에 정치가 혹은 실업가로 대활약하는 투기자가 불소하니 구토할 일이다. 이날을 잘 기념하는 것은 교도들의 당연한 도리요 의무일지나 교도가 아닌 일반인 더구나 관청들도 덩달아 크리스마스 츄리를 현관에 꽂아 놓고 야단법석이니 가소로운 아부 투기의 일종 시대 유행병이 아닐까. 24, 5 양일은 젊은 청년 남녀들의 무도가 밤새도록 광적으로 성행되어 가고 있으니 일반 평민 특히 빈천계급의 생활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한심한 사태이다.’(〃1955년 12월 25일)

백산은 또 ‘자유당 간부 개편은 주류파의 독무대로 이기붕군의 측근자로서 조직되었다. 이기붕군은 점차로 신실(信實)이 부동한 야심이 노출하기 시작인데 이것은 주위 측근자 대부분은 친일분자 이기주의의 시류 처세술자의 재사(才士)들의 포위에 든 까닭이다. 이군은 우리 혁명 사상 아무 공헌도 없는 사람으로서 경무대세도 바람에 국회의장으로서 자유당 중앙위원회의장으로서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1956년 6월 29일)고 자유당 시대의 2인자인 이기붕과 주변 인물들을 비판했다.

백산은 숨을 거두기 35일 전인 1956년 12월 11일 자유일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남겼다. ‘쌍공 정이형 동지가 서세하다. 정 동지는 내가 정의부 조선혁명총사령으로 있을 때에 문학빈과 같이 5개 중대장 중의 일인인 직계 부하였다. 적에 체포된 이래 근 20년 의주 평양 서울 감옥으로 전전하다가 미군에 의하여 석방되어 출옥하였는데 금년이 60세 가까이 되었다. 12월 15일이 발인인데 시간은 오전 10시 반…20년 영어 생활한 진정한 애국자 독립군이다. 재래 내지(內地) 인간들은 애국자를 애지중지할 줄 아는 사람이 부족. 대의명분에 밝지 못한 까닭이겠지.’라며 애석해했다.

정리 김동현기자 moses@seoul.co.kr
2011-02-28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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