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硏 “삼국사기 분석 결과 첨성대는 천문대였다”

천문硏 “삼국사기 분석 결과 첨성대는 천문대였다”

입력 2011-04-07 00:00
업데이트 2011-04-0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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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문연구원 김봉규 박사는 5일 “신라시대 축조된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고 밝혔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첨성대가 상징적인 건물이라거나 제사를 지내던 제단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김 박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증보문헌비고 등에 실린 고대 천문관측기록을 분석한 결과, 첨성대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640년대 이후 기록된 유성의 떨어진 위치들이 모두 첨성대를 둘러싸고 있다”며 “이는 첨성대에서 유성을 관측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어 “첨성대가 완성된 이후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의 수가 이전보다 10배 이상 증가했다”며 “기록된 내용도 매우 정밀해졌다”고 덧붙였다.

즉, 541년부터 640년까지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이 3건에 불과했지만, 첨성대 축조 예상시점인 641년부터 740년까지의 기록은 38건에 달하고 있다.

또 첨성대 축조 전인 467년 10월 삼국사기 기록에는 ‘큰 별이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떨어졌다’는 식의 막연하고 간단한 내용이 있지만, 첨성대 축조 후의 718년 11월 삼국사기 기록에는 ‘유성이 묘수(황소자리)에서 규수(안드로메다자리)로 들어갔는데’라는 식의 나타난 위치와 사라진 위치 등이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기록돼 있다고 김 박사는 설명했다.

김 박사는 특히 “신라가 별에 대한 제사를 ‘본피유촌(本彼遊村)’에서, 해와 달에 대한 제사를 ‘문열림(文熱林)에서, 오행성에 대한 제사를 영묘사(靈廟寺) 남쪽에서 지냈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도 확인했다”며 “이는 신라가 첨성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천문과 관련된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첨성대가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아님을 확고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 같은 내용의 논문을 오는 7일 충북 청주 충북대에서 열리는 한국천문학회 봄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한편, 오는 14일 영국에서 개최되는 ‘국제 고천문 학술발표대회’에서도 발표할 예정이다.

김 박사는 “지금까지는 결정적 증거 없이 그저 막연하게 첨성대가 천문대라고 말해왔지만, 신라가 남긴 삼국사기 기록들이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었다”며 “영국에서 열리는 학술발표회에서 인정받으면 첨성대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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