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씨족부락 여진, 어떻게 동북아 패권국이 되었나

15세기 씨족부락 여진, 어떻게 동북아 패권국이 되었나

입력 2013-05-10 00:00
업데이트 2013-05-1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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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 부락에서 만주 국가로’ 대제국 淸의 기원·성쇠

1616년 정월 초하루, 만주족의 국가가 탄생했다. 후금이다. 청 태조 누르하치는 허투알라에서 과거의 한(Han)칭호를 버리고 정식으로 최고 통치자로 칭호를 제정했다. 새 칭호는 ‘하늘이 여러 나라를 기르라 하여 임명하신 영명한 한’이었다. 이 시기 누르하치는 여허여진을 제외하고 자신이 속한 건주여진은 물론, 해서여진, 동해여진을 복속하여 통일국가를 수립했다.

‘만주실록’ 권6에 실린 1612년 심양을 함락시키는 만주족의 군대.
‘만주실록’ 권6에 실린 1612년 심양을 함락시키는 만주족의 군대.
1395년 편찬된 조선의 ‘용비어천가’에는 건주여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동북 1도는 원래 왕업을 일으킨 땅으로서,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한 지 오래돼 야인(野人·여진)의 추장이 멀리서 오고, 일란투먼(移?豆漫)도 모두 복종하여 언제나 활과 칼을 차고 잠저에 들어와서 좌우에서 모셨고’

여기서 ‘일란투먼’은 여진어로 3만호(萬戶)를 말하는 것으로 송화강 하류역의 세 추장이 이끄는 부였다. 원나라에 여진이 5만호가 살다가 원 말기에 오도리, 후르하, 타온의 3만호만 남았던 그 부다. 용비어천가의 이 대목은 누르하치의 6대조로 조선의 동북지역인 회령(여진:알목하) 지역으로 이주한 오도리 만호의 몽케테무르도 포함한 것이다. 장백산 동남쪽이 만주족의 발원지다.

14세기 중엽 무렵에도 수렵과 어로 활동을 하고, 철기도 생산하지 못해 15세기 후반에 명·조선과의 밀무역을 통해 철 화살촉과 철제 갑옷, 등자 등을 확보했고, 15세기에야 겨우 농사를 시작했던 씨족부락 여진이 어떻게 최고의 문명국가라는 명나라와 조선의 혹독한 견제를 감내하고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재편했을까, 오랑캐라 불리며 무시당하였던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청제국(1644~1912)으로 278년간 패권을 누리고, 역대 최대의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을까?

이런 궁금증은 유소맹(류샤오멍·61) 중국사회과학원 교수가 쓴 ‘여진부락에서 만주국가로’(푸른역사 펴냄)를 읽어보면 풀 수 있다. 한국사람 중에 청 제국이 등장한 배경을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청의 등장을 그저 명이 조선의 임진왜란에 파병한 끝에 국력이 쇠약해진 덕분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극동에 위치했다는 지정학적 이유로 한국이 역사적으로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든지, 강력한 중국(원, 명, 청) 때문에 중원으로 땅을 넓히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여진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자신들의 생각이 옳았는지 점검해볼 수 있겠다.

여진의 혈연조직은 15세기 이전에는 할라(씨족)에서 무쿤(새로운 씨족), 욱순(일족), 보오(가족)의 순서로 확대 발전한다. 이런 일족과 가족의 발전은 사유재산 증가와 가내 노예의 소유와 관련이 있다. 생산력이 발전하고, 생산력 발전을 위한 대외적 약탈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불평등이 발생하고 혈연과 지연 중심의 가샨과 같은 부락이 아닌 국가조직으로 발전해나갔던 것이다. 특히 여진의 핵심 세력이었던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다른 혈연의 일족으로 구성된 지역연합체로, 세습제도가 발전하고, 군사적 수장이 출현하고, 부락장의 대외적 역할이 강화되면서 상층부 일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해서여진과 건주여진이 급속하게 발전한 것은 문명세계인 명과 접촉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명과의 조공, 호시(互市)참여가 진행된 것이다. 여진은 모피, 잣, 버섯, 꿀, 가축 등을 명나라에 보내고 농기구, 소, 수공업품, 쌀, 소금, 비단, 면포 등을 받아왔다. 명과의 호시는 월 1회에서 나중에는 하루 1회로 급속히 증가했고, 명나라 말기에 호시에 몰리는 인원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조공은 여진은 명의 답례(회사·回賜)품을 은으로 통일했는데 여진사회로 들어오는 은의 수량이 연간 1만 5000량에 달했다. 명은 조공의 연간 인원을 해서여진은 1000명, 건주여진은 500명으로 제한했는데, 건주여진이 강성해지면서 조공인원이 1500명이 돼 규정의 3배나 됐다. 또 여진은 호시에서 거두는 세금도 은본위로 계산해서 징수해, 가치의 척도를 은으로 통일했다. 즉 화폐로 은이 통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16세기의 이야기다.

시장의 발달은 사유제와 국가발전의 견인차가 됐다. 물질적 욕망이 자극됐지만, 다른 한편 집단의 평등원칙이나 상호협조의 관계망이 무너지면서 부족단위 대신 국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만주국은 자신들의 근본이었던 혈연과 지연에 기반을 둔 사회관계망을 군사조직(니루·구사), 더 나아가 팔기군 등 재편하면서 더 효율적인 통치와 전쟁수행에 나선다.

17세기로 들어오면 병자호란 등 우리에게 익숙한 사건들이 만주국의 시각으로 다뤄지고 있다. 불과 30~40년 전 자국의 역사도 배우지 않는 한국에서 만주국의 등장과 성장, 몰락을 다룬 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국가의 운명은 다른 국가의 운명과 엮여 있으니, 배우지 않으면 조선이 어떤 나라였는지 잘 모를 수밖에 없다. 나를 잘 알기 위해 남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2013-05-1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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