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한 고지도, 어쩌면 반할 지도

엉뚱한 고지도, 어쩌면 반할 지도

하종훈 기자
하종훈 기자
입력 2021-12-16 17:26
업데이트 2021-12-17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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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반할 지도/정대영 지음/태학사/192쪽/1만 6000원

조선·중국 중심 1600년대 ‘천하도’
‘불사국’ ‘소인국’ 문학적 요소 가미
역사·이야기 담은 옛 지도 매력 조명
전국 목장 정보 담은 실용적 지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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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인 1600년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천하제국도’ 지도첩에 수록된 ‘천하도’. 중국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조선, 일본 외에도 상상 속 국가인 ‘일목국’, ‘소인국’ 등이 등장한다. 태학사 제공
조선 후기인 1600년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천하제국도’ 지도첩에 수록된 ‘천하도’. 중국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조선, 일본 외에도 상상 속 국가인 ‘일목국’, ‘소인국’ 등이 등장한다.
태학사 제공
160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조선 후기의 세계지도 ‘천하도’(天下圖)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내부의 대륙과 외부 고리 형태의 다른 대륙, 안팎의 바다로 구성돼 있다. 여기엔 당시 조선, 일본, 류큐(오키나와) 등 몇몇 아시아 지명이 확인되지만, 눈이 하나인 사람들이 산다는 ‘일목국’,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국’, 작은 사람이 사는 ‘소인국’ 등 상상 속 나라들도 등장한다. 동시대 중국에선 이미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의 윤곽이 뚜렷한 ‘곤여만국전도’(1602)가 제작됐음에도 유독 조선에서 이런 지도가 보편화한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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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 박사인 정대영 국립대구박물관 학예사는 신간 ‘알고 보면 반할 지도’를 통해 이처럼 고(古)지도에 담긴 인문지리학적 사고의 흐름을 펼쳐냈다. 저자는 옛 지도가 단순히 지리 정보를 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명품 그림 못지않은 미적 감흥과 문학적 요소, 간절한 소망, 회한, 유머, 세계관이 응축된 종합예술작품이라고 규정한다.

‘천하도’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화이(華夷)사상을 뚜렷이 반영한다. ‘제2의 중국’을 자처하던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여진족의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조선이 망한 명나라를 계승한다는 ‘소중화’(小中華) 의식은 오히려 심화됐고 사회는 전보다 보수화됐다. 유럽인들이 세계를 탐험해 만든 지도가 앞에 있었음에도 유학자들은 평생 갈 일 없는 나라 대신 중국 고대 문헌 ‘산해경’에 나온 상상 속 국가로 자신들만의 세상을 창조한 것이다. 이 지도의 틀을 벗어나는 데는 200년 가까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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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 때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수록된 ‘동람도’ 중 ‘팔도총도’. 우리나라 모양이 남북으로 압축돼 둥글넓적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이 거의 직선상에 있다.  태학사 제공
조선 중종 때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수록된 ‘동람도’ 중 ‘팔도총도’. 우리나라 모양이 남북으로 압축돼 둥글넓적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이 거의 직선상에 있다.
태학사 제공
저자는 단순히 조선의 문화 지체 현상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조선에서 ‘천하도’를 만든 이유가 유교와 소중화 의식 때문이었다면 서양의 천하도는 기독교 때문에 나왔다. 중세 유럽에서 유행했던 ‘T-O’ 지도는 성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럽, 아프리카, 중동만이 세상 전부였다. 자신이 살아가는 장소가 얼마나 작고,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의 편협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이다.

실측에 근거한 한반도 지도로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를 떠올리지만 정교한 지도가 나오기까지 결정적 역할을 한 선각자들은 따로 있었다. 18세기 학자 정상기는 똑같은 축적을 기준 삼아 전국을 8장의 지도로 그려낸 ‘동국지도’를 제작했고, 19세기 최한기는 중국 자료를 활용해 지구본을 본뜬 세계지도 ‘지구전후도’(1834)를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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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국 138개 목장 소재지에 목장 면적, 소, 말 통계 등을 기록한 ‘목장지도’(1663)의 첫 장. 태학사 제공
조선 후기 전국 138개 목장 소재지에 목장 면적, 소, 말 통계 등을 기록한 ‘목장지도’(1663)의 첫 장.
태학사 제공
저자는 전란을 겪은 조선 후기 사회가 관념론에만 빠져 지도의 실용성을 마냥 외면하지는 않았다는 점도 강조한다. 농사의 근간이 되는 소와 말의 건강은 국가의 사활이 달린 문제였다. 1663년 ‘목장지도’는 전국 138개 목장 소재지 지도에 목장 면적, 소, 말 통계를 기록했다. 첫 장에 중국 황제에게 예물로 바칠 말들이 그려져 흥미를 자아낸다. 병인양요(1866) 등을 겪은 대원군 시대 제작된 ‘1872년 지방지도’는 산뜻한 색과 지역에 대한 묘사가 일품이다. 불꽃이 사그라지기 전 찬란했던 왕조 문화의 정점을 보는 듯하다.

현대 지도는 정확한 만큼 주관이 개입될 여지는 사라졌다. ‘사람’ 이야기와 역사 속 사연이 묻어난 옛 지도의 매력에 흠뻑 젖다 보면 오늘날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을 뒤로 두고 보는 우를 범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2021-12-17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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