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리스트의 모든 것-격정·침묵·여운
리스트 서거 2백주년을 기념하는 백건우의 2주에 걸친 두 번의 콘서트는 아주 오랜 시간 리스트를 연구하고 깊이 있게 천착하지 않은 피아니스트라면 도저히 꾸밀 수 없는 작품 구성부터 탄성을 지르게 만들었다. 백건우는 이번 공연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리스트의 작품들을 프로그램에 올렸다간 지웠다. 그리고 70년대, 80년대 이후 다시 만나는 리스트를 연주하기 위한 백건우의 공연 준비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긴장된 것이었다. 그는 일체의 접촉을 끊고 리스트에 집중하며 담금질했다. 6월 19일에 열린 <문학 그리고 피아노>는 리스트의 작품이 얼마나 파워풀한 터치와 강렬한 표현력을 요구하는지를 귀로 들을 수 있었던 압도적인 공연이었다.시적이고 종교적인 선율 중 사랑의 찬가와 2개의 전설에서는 리스트의 깊은 신앙심을 기도하듯 표현하면서 ‘새에 포교하는 앗시시의 프랑소아’에서는 새에 대한 섬세한 표현을, 물위를 걷는 파올라의 성 프랑소아에서는 구원의 빛과 희망으로 믿음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쇼팽 녹턴 풍의 <위로> 3번에서는 침착하고 고요한 가창적인 톤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며 휴식을 선사했다.
피날레는 리스트의 보물 ‘순례의 해’ 중 ‘페트라르카의 소네트’와 ‘단테를 읽고’가 끝난 후였다. 초인적인 명인기로 두 작품을 들려주고 나자 갑자기 암전이 되더니 영화
<시>의 주인공 미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윤정희 씨가 원래 리스트가 프라일리그라트의 시를 갖고 가곡으로 작곡한 <사랑의 꿈>의 시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를 떨리는 음성으로 읽고 나자 백건우는 바로 그 곡을 연주했고 함께 부둥켜 안고 커튼 콜을 한 장면은 ‘문학과 피아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피날레였다.
잘 알려지지 않은 <로망스>는 매우 아름답고 편안한 노래였지만 반대로 뒤를 이은 스케르초와 행진곡은 엄청난 테크닉과 끊임없는 포르테로 청중을 윽박지르는 마치 아레나에 나타난 글래디에이터 같은 속주의 스포티브한 곡이었다. 이 두 곡의 대비를 통해서도 리스트가 대중과의 접점을 매우 잘 아는 아티스트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독창적이고 시대를 앞서 나가는 진취적인 음악가라는 두 가지의 세계를 갖고 있었던 아티스트로서의 이중적인 모습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순례의 해 중 ‘애처롭도다’와 ‘마음을 정결하게’는 우리의 마음을 숭고하게 만드는 리스트 말년의 영적, 종교적 체험을 가능케 한 터치를 들려주었다.
그는 이번 연주회를 통해 그간 우리가 알고 있는 리스트 곡들 <헝가리안 랩소디>
<사랑의 꿈> <메피스토 왈츠> 등등은 결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리스트라고 하는 대륙은 우리에게 아직도 더욱 발견되어야 하는 탐험의 대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특히 이번 백건우 그리고 리스트 콘서트의 대미를 장식한 소나타 b단조는 그야말로 시대의 통념을 뛰어넘은 형식을 파괴함과 동시에 창조적인 날개를 맘껏 펼쳤던 리스트의 자유로움을 들려줌과 동시에 가슴을 철렁 무너져 내리게 하는 위력적이고 경건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피아니시모로 끝나는 마지막 작품 리스트의 B단조 소나타가 끝날 때 백건우는 여운을 두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 콘서트에 집중했던 청중들 역시 그가 일어나기를 끝까지 기다리며 하나가 되었다. 이 숭고한 침묵의 시간의 공유. 이런 진지함을 우리는 공연장에서 일 년에 과연 몇 번이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일까?
두 번의 콘서트가 있었던 2주간의 시간. 한국의 클래식팬들은 리스트에게 사로잡혀 있었고 벗어날 수도 없었다. 백건우는 자신의 몸과 영혼을 던져 리스트를 예술의전당 무대에 세웠던 것이다.
글_ 장일범 음악평론가, KBS 클래식FM ‘장일범의 가정음악’ 진행자·사진제공_ 크레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