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사람들] 배불러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들] 배불러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입력 2011-04-10 00:00
업데이트 2011-04-10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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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학생미혼모 대안학교, 바다의 별

열여섯 살 정희(가명)는 학교 가기가 두렵다. 임신 4개월이기 때문이다. 임신 사실을 안 뒤부터 전주의 한 미혼모 쉼터에서 지냈지만 체류가능 기간이 만료된 상태. 지난 2월, 정희는 평소 알고 지내던 수녀님의 손에 이끌려 인천 자모원을 찾았다. 앞으로 1년간 이곳에서 출산을 준비하고 수업도 들으며 학업을 이어갈 것이다. 이는 인천 자모원에 미혼모 대안학교인 ‘바다의 별’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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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1년 반까지 머물 수 있는 ‘바다의 별’은 학생미혼모들을 위한 단기 대안학교다. 이곳에서 중·고교과정 수업을 들으면 원래 다니던 학교의 수업일수를 채울 수 있다. 자퇴를 한 미혼모라도 수업을 들으며 검정고시를 준비할 수 있다. 낙태하지 않고 생명을 지키기, 이 원칙을 따를 때 오는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즉 미혼모의 학습권을 보장하기, 이것이 ‘바다의 별’의 목표이자 설립 의의다.

인천 자모원은 2010년 7월, 국내 최초로 학생미혼모 대안교육 위탁기관으로 지정돼 ‘바다의 별’을 설립하고 9월부터 수업을 시작했다. 국내 미혼모 증가 실태를 보여주듯, ‘바다의 별’을 거쳐 아이를 출산하고 학교로 돌아간 미혼모가 6개월 만에 30명을 훌쩍 넘었다. 현재는 미혼모 10여 명이 9명의 자원봉사 선생님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

수업은 기본 교과목과 12개의 인성교육 프로그램으로 구성돼 있다. 자모원 신지영 원장(58세)에게 인성교육을 강조하는 이유를 물었다.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대부분의 학생미혼모들에게 정서적인 안정을 되찾아주기 위해서는 교과수업만큼이나 인성교육이 중요합니다.”

모든 수업은 깐깐하게 진행된다. 과학을 가르치는 변석찬 교장(53세)은 자퇴한 미혼모들에게 검정고시를 준비시키려고 10년간의 기출문제를 모두 분석했다. 시험도 엄격하게 치른다. “전라도의 한 고등학교에 소속을 두고 있는 미혼모 학생에게 학교 측에서 우편으로 시험지를 보내 왔습니다. 시험문제가 유출되지 않게 그 학교의 시험 시간에 맞춰 시험을 보게 했습니다. 선생님 두 분이 감독을 하고요. 교육기관인 ‘바다의 별’의 공신력이 걸린 문제니 철저해야만 해요.” 원 소속 학교에서 시험지를 보내오지 않으면, ‘바다의 별’ 선생님들이 학생미혼모를 직접 학교까지 데리고 가 시험을 보게 한다.

선생님들의 열성에 화답하듯 ‘바다의 별’에 입소한 뒤 공부에 큰 뜻을 품게 된 학생미혼모들도 있다. 열아홉 살 선주(가명)도 그중 하나다. 과학을 좋아하는 선주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새벽 4시까지 책을 들여다볼 정도다. 올 11월에 수능을 볼 선주는 장차 건축학과에 진학해 9급 공무원이 되는 게 꿈이다. 곧 태어날 아이에게도 강한 엄마가 돼주고 싶다.

선주처럼 출산 후 아이를 직접 양육할 미혼모의 경우, 고교졸업장을 받고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생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학력이 직업 선택을 좌우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이혜원 선생님(53세)은 학생미혼모들이 현실적으로 대학 전공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성적에 맞춰 전공을 선택하지 않아요. 직업 선택에 유용한 실용적인 전공을 일단 정해놓고 점수를 맞추려고 공부하죠.”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의 일부다. 정희와 선주 같은 어린 미혼모들이 생긴 것은 아무도 그들에게 성(性)의 가치와 결과를 제대로 일러준 일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들이 한때의 실수를 딛고 일어나 사회라는 바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대안학교와 재활시설을 늘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신지영 원장과 변석찬 교장, 이혜원 선생님은 무엇보다 미혼모 발생을 미연에 막는 예방책부터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현실적인 성교육이 필요합니다. 또 어릴 때부터 성의 본질과 가치를 인문학적 측면에서 가르치는 근본적인 성교육도 병행돼야 할 것입니다.”

글, 사진 이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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