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베트남 기행] 박물관들의 화두는 ‘독립·저항’ 하지만 건물은 中·佛 형식 일색

[新베트남 기행] 박물관들의 화두는 ‘독립·저항’ 하지만 건물은 中·佛 형식 일색

입력 2011-08-23 00:00
업데이트 2011-08-23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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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을 가면 반드시 가 봐야 할 곳으로 박물관을 꼽는다. 박물관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집대성한 공간이어서 한 곳에서 역사와 문화를 일별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국립박물관의 전시는 그 나라가 국민과 외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역사와 문화를 한자리에 모은 극히 의도된 연출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베트남 여행에서 필자는 ‘보여주고’ 싶은 역사와 버스 차창 너머로 ‘보이는’ 현실의 간극을 재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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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하노이 시가지의 주택.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하노이 시가지의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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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하노이 시가지의 주택. 하노이 역사박물관. 아치형 입구와 베란다 모티브는 근대를, 기와지붕은 전통 양식을 취해 양자를 절충했다.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하노이 시가지의 주택. 하노이 역사박물관. 아치형 입구와 베란다 모티브는 근대를, 기와지붕은 전통 양식을 취해 양자를 절충했다.




●거리엔 식민지 역사 고스란히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보는 시가지풍경에서 프랑스식 건물이 의외로 많았다. 하노이시내와 시내를 벗어나 할롱베이로 가는 길가에는 2, 3층의 프랑스식 주택이 이어져 있다. 창문 앞에 베란다를 마련하고 베란다 양쪽에는 상단에 장식을 입힌 기둥을 세우고 지붕에는 삼각 첨탑을 올린 주택이다. 베란다 주택은 비나 햇볕에서 건물을 보호하고 무더위와 습기에 적응하는 열대 건축양식이면서 동시에 인도, 싱가포르, 홍콩에도 널리 세워졌던 콜로니얼 건축양식이기도 하다. 북부지역에는 프랑스풍 주택이 많았던 반면 중국식 주택은 적었다. 프랑스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았던 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베트남에 왜 중국양식의 주택보다 프랑스풍의 주택이 많은가? 이러한 의문은 중부와 남부 베트남과 비교하면 더욱 강해진다. 베트남 마지막 왕조 응우옌 왕조의 근거지였던 중부베트남의 후에나 호이안에도 서구식 주택이 많이 보이나 보다 단순화된 스타일이다. 그런데 프랑스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은 호찌민 시에는 프랑스풍 민간주택은 상대적으로 가장 적게 보였다.

현재의 주택양식에서 보자면 베트남은 유교와 한자, 조공체제를 근거로 한 동아시아세계의 일원으로서의 ‘월남’과는 거리가 멀다. 동아시아로서 월남의 역사는 박물관에 있다. 베트남의 역사는 북으로는 항거하고 남으로는 팽창하며, 중국 쪽에는 왕이라고 굽히나 주변국에는 황제라고 위세 부리는 ‘북거남진 외왕내제’(北拒南進 外王內帝)의 8자로 압축할 수 있다.

하노이 역사박물관에는 토기 등 고대의 발굴품, 불상, 도교사원, 발굴선박, 한문으로 된 고서, 나전칠기, 벽화, 병풍, 조각 등이 대체로 시대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러한 전시품은 중화문명화의 과정을 밟았던 베트남의 역사를 보여준다. 박물관에서 특히 관심을 끈 것은 민족의 독립에 관한 대형 역사화였다. 1, 2층에 몽골 침략을 저지한 역사화와 1945년 9월 2일 독립선언의 역사화를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은 실물을 전시하며 말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데, 굳이 대형역사화를 내걸어야 할 필요를 느낄 정도로 역사화 자체에 박물관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것이다. 그 의도란 중국에 저항한 역사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겠다. 원나라 침략을 저지한 역사화는 호찌민의 역사박물관에도 입구에 대형 조각화로 내걸렸을 만큼 중국대륙에 대한 저항 역사는 베트남인의 대중적 역사인식에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몽골 침략 저지 대형역사화 전시

그러나 하노이 박물관의 전시에는 프랑스가 지배한 60여년 식민지의 역사는 소략하고, 수탈이나 착취를 강조하는 전시보다는 독립투사의 사진이 걸린 정도다. 일본의 5년 지배에 관한 전시도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다. 프랑스와 미국과 싸운 1, 2차 인도차이나 전쟁도 역사박물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프랑스풍의 주택이 많은 점을 이러한 박물관의 전시에 비추어 보면, 프랑스에 지배받은 역사를 수탈과 착취 혹은 차별의 역사로 기억하기보다는 서구문명의 세례를 일찍 받은 점을 역사적 자산으로 삼는 인식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노이의 건물들은 대개 1975년 이후의 것으로 짐작된다. 미군의 잦은 폭격으로 전통적인 시가지가 온전하게 남았을 법하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 집을 지을 때 주택의 모델을 남부베트남의 프랑스풍에서 구한 것은 당시 문화대혁명의 회오리에 빠져있던 중국보다는 역사 속에 새겨진 프랑스문화에 대한 선망이 우선되었고 도이머이 이후 경제가 발전하면서 그 선망은 더욱 주택 신축에 강하게 투사되었을 법하다.

열대가 생물학적 다양성을 보이듯이, 열대의 베트남은 문화적 다양성을 품고 있다. 열대의 정글은 인간의 이동을 어렵게 만들고 따라서 국가적 통일성보다는 지역문화에 강한 독자성을 띠게 한다. 베트남의 역사에서 왕조의 이합집산이 거듭된 배후에는 고유한 지역문화를 바탕으로 한 토착세력이 있었다. 종족이라는 혈연적 유대가 사회조직의 바탕이고 사투리가 발달한 것은 그 증거의 하나이다. 지역문화의 대표적인 존재는 참파 문화이다. 2~17세기에 걸쳐 베트남 중남부에 존재했던 참파 왕국의 문화는 하노이 박물관에서도, 호찌민 박물관에서도 일정한 전시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경제발전 후 건물에 ‘선진국 선망’ 반영

호이안의 역사마을은 1990년대 이후 옛날 건물을 복구하여 마을을 재조성하고, 옛 건물이 수많은 화랑과 상점을 이루면서 여기저기 산재한 작은 박물관으로도 활용되었다. 1층 입구는 그림을 파는 화랑이면서 1층 안쪽과 2층을 박물관 전시실로 꾸몄다. 건물과 전시실이 역사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화랑이나 상점의 역할을 겸한 것이다. 웅장한 대형 박물관은 관람객을 쉽사리 지치게 만드나, 지척에 산재한 작고 아담한 박물관은 구경꾼이 자신의 시선으로 유물에 말 걸기가 수월하다. 후에의 궁궐에는 복구하지 않은 루문과 건물이 탈색되거나 혹은 반쯤 허물어진 그대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세월의 상처를 실감시키는 탈색되고 허물어진 유적이야말로 훌륭한 역사 교재였다.

글 사진 하세봉 한국해양대학교 박물관장

2011-08-23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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