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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 조선왕조실록 만드는 그녀

대중음악 조선왕조실록 만드는 그녀

김지예 기자
김지예 기자
입력 2021-11-09 17:42
업데이트 2021-11-10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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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사는 법] 아카이빙에 빠져 제작사 차린 32년차 음악감독 최정윤 대표

“신중현 선생님이 좀 편찮으시대.” 작곡가 윤일상과 나눈 짧은 대화가 시작이었다. 전설들이 떠나면 대중음악의 역사와 의미마저 잊혀질 수 있다는 위기감. 32년간 방송 음악감독으로 일해 온 최정윤(54) 일일공일팔 대표는 “대중음악 기록을 제대로 해 보자”는 마음으로 아카이빙을 위한 전문 제작사를 차렸다. 그리고 1년 6개월이 흐른 지난 1월 SBS 다큐 음악쇼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를 통해 10회에 걸쳐 한국 대중음악의 중요한 순간을 짚어 냈다. 화제의 프로그램은 끝났지만 아카이빙은 계속되고 있다. 서울 성동구 일일공일팔 사무실에서 만난 최 대표는 “현재 한국 대중음악의 뿌리를 기록하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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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윤 일일공일팔 대표의 사무실 한편에는 SBS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에 등장했던 뮤지션들의 아카이빙 상자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작업은 ‘아카이브K 콘서트’와 유튜브로 선보이는 ‘슬기로운 음악대백과’에서 이어지고 있다.  김명국 선임기자 daunso@seoul.co.kr
최정윤 일일공일팔 대표의 사무실 한편에는 SBS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에 등장했던 뮤지션들의 아카이빙 상자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작업은 ‘아카이브K 콘서트’와 유튜브로 선보이는 ‘슬기로운 음악대백과’에서 이어지고 있다.
김명국 선임기자 daunso@seoul.co.kr
●준비만 2년… 가요 역사 짚은 ‘아카이브K’

‘아카이브K’는 TV에서 만나기 어려운 1980년대 대중음악부터 최근 케이팝의 성취까지 한국 대중가요를 만들어 온 사건과 주역을 하나씩 조명해 냈다.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 등 케이팝 대표 주자는 물론 김민기 대표가 이끄는 학전과 조동진, 들국화, 김현식, 시인과 촌장, 신촌블루스 등이 속했던 동아기획 사단까지 총출동해 음악계는 물론 대중에게도 큰 관심을 얻었다. 생생한 증언과 고품격 공연도 호평을 이끌어 냈다.

프로그램을 제작한 최 대표는 “욕심껏 하자면 내용도 이야기도 채울 게 훨씬 더 많았다”고 돌이켰다. 특정 시청층을 노리기보다 꼭 다뤄야 할 내용을 정하는 데 더 신경썼다는 그는 “시청자들이 몰랐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고 했다. 방송 준비 기간 약 2년, 인터뷰 분량만 1만 5012분에 달하니 못다 한 이야기가 더 많다.

방송에 대해 의외의 호응을 보인 건 10~20대였다. BTS나 블랙핑크에만 열광할 것 같았던 이들이 김민기, 조동진의 곡에 귀를 열었다. “젊은층이 이 음악들을 몰라 못 들었던 것일 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으니 정말 뿌듯하더라고요.” ‘아카이브K’의 성공에 힘입어 유튜브 채널 ‘우리 가요’를 열어 콘텐츠도 꾸준히 만들고 있다. 그룹 레드벨벳의 슬기와 음악평론가 김작가가 진행하는 ‘슬기로운 음악대백과’는 대중음악사에 기여한 아티스트들이 출연해 생생한 경험과 음악 인생을 풀어놓는다. 이런 작업들이 기반이 돼 지난달에는 ‘아카이브K 콘서트’를 열어 학전과 동아기획 출신들을 한 무대에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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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K 콘서트 무대에 오른 동아기획 사단. 일일공일팔 제공
아카이브K 콘서트 무대에 오른 동아기획 사단.
일일공일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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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음악대백과’에 출연한 윤상. 일일공일팔 제공
‘슬기로운 음악대백과’에 출연한 윤상.
일일공일팔 제공
●살던 집도 동아기획과의 인연

최 대표는 어쩌다 아카이브에 ‘진심’이 됐을까. 예술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서도 클래식 작곡을 전공한 그는 대중음악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저희 집에 오셔서 모든 라디오에 테이프를 붙여 고정을 하셨어요. 주파수 93.1, KBS 클래식 FM 말고는 듣지 말라고요. 그런데 우연히 오빠가 녹음해 놓은 테이프를 몰래 눌러 보고 ‘이런 노래도 있구나’ 하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가 떨리는 가슴으로 재생한 테이프에는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 같은 대중가요와 산울림의 곡들이 담겨 있었다. 큰일이 나는 줄 알고 얼른 테이프를 껐지만, 차차 새롭고 아름다운 대중음악이 귀를 사로잡았다.

대학 4학년 시절 우연히 시작한 방송국 아르바이트는 삶을 바꿔 놓았다. 방송에 적절한 음악을 찾아 넣거나 작곡하는 일이었다. 이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32년간 음악감독으로 방송국 밥을 먹게 됐다. 일이 너무 재밌어 쉼없이 달리다 보니 그동안 맡은 프로그램만 900개쯤 된다. EBS ‘딩동댕 유치원’, ‘꼬마 요리사’, ‘만들어 볼까요’ 등 히트 어린이 프로그램의 음악을 만들었고, SBS ‘야심만만’, ‘힐링캠프’, ‘K팝 스타’, ‘더 팬’, 최근 종영한 ‘라우드’까지 예능과 오디션 역사를 함께했다. 온갖 음악을 머릿속 데이터베이스에 넣고 프로그램에 맞게 활용해 온 그는 “작곡과가 아닌 ‘잡곡과’를 나왔다”며 농담을 보탰다.

아카이빙은 그동안 음악에 진 빚을 갚는 작업이기도 하다. “저는 대중음악계가 창작한 좋은 음악들을 활용해 방송을 만들어 왔잖아요. 그래서 마음에 빚이 늘 있었어요. 영화 등 다른 예술에 비해 대중음악 자료는 일반인들이 접하기 어려워 아쉬웠고, 기록을 제대로 모으자는 겁 없는 계획을 세웠죠.”

회사명은 거장들의 앨범을 쏟아낸 동아기획 설립 당시 사무실 주소인 서울 종로구 내수동 110-18번지에서 따왔다. 이 주소에도 운명 같은 우연이 있었다. 동아기획 옛 자리에 주택이 들어섰는데, 최 대표가 그곳에 거주했던 것이다. “그 자리인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동아기획 막내 김현철이 저희 집에 놀라오더니 ‘여기 동아기획이었잖아’ 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최 대표의 집은 성지순례하듯 뮤지션들이 놀러 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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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SBS ‘아카이브K’에 출연했던 방탄소년단. SBS 제공
올해 3월 SBS ‘아카이브K’에 출연했던 방탄소년단.
S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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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K’ 방송에 출연했던 한국 인디신의 주역들. SBS 제공
‘아카이브K’ 방송에 출연했던 한국 인디신의 주역들.
SBS 제공
●“김민기는 작업실, 김현철은 지원군 자처”

평론가 김작가는 “대중음악 조선왕조실록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케이팝이 세계의 주목을 받는 요즘 서태지도 BTS도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은 아니기에 이전 자료들을 집대성하는 건 대중음악사의 구멍을 채우고 문화를 기록하는 일이다.

최 대표는 “그동안 많은 업계 관계자들이 나름대로 아카이빙에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강조한다. 예전에는 소속사가 바뀌면서 음반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도 있고 하루하루 공연이 바빠 기록의 중요성을 놓쳤지만, 개인적으로 자료를 모은 이들은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일일공일팔의 작업은 “여기 오면 우리 가요와 관련된 게 다 있다”는 믿음을 갖도록 집을 짓는 것이다. “기존에 하고 계신 분들과도 활발한 협업이 됐으면 한다”는 최 대표는 “최대한 많은 분들이 와서 씨를 뿌리도록 흙을 다지는 과정까지 했다”고 비유했다.

특히 그는 무대에서 조명받는 가수들뿐 아니라 음악과 관련된 수많은 스태프의 역사도 다루려 한다. 작곡, 작사, 세션, 소리를 만지는 역할 등 모두 음악을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대중음악에 대한 관심이 시대적으로는 2000년대 이후, 직업적으로는 가수에 쏠려 있다고 진단한 최 대표는 “조명받지 못한 부분을 조명해 기울어진 균형을 잡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덧붙였다.

음악계 동료와 선후배들은 든든한 지원군이다. 지인을 연결해 주고, 오래된 희귀 자료를 보여 주기도 한다. 김민기 대표는 대학로 학전 4층에 위치한 자신의 작업실을 열어 주고 “필요한 것들은 다 가져가라”며 힘을 보탰다. 가수 김현철은 “누나 회사에서 하는 일이라면 다 돕겠다”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정상급 세션들은 가장 먼저 스케줄을 내 공연을 꾸몄다.

●‘아카이브K’2도 구상… 조용필 꼭 나왔으면

방송으로 필요성을 알린 만큼 앞으로는 쉽고 다양한 방식으로 아카이브를 선보일 계획이다. 우선 2000년대 이전 대중음악 자료를 한데 모은 온라인 플랫폼 ‘아카이브K’를 준비 중이다. 평론가 30명이 선정위원 및 집필진으로 참여해 의미 있는 사건과 내용을 정리한다. 음반 관련 자료와 영상들도 모은다. 여기에는 팬들이 갖고 있는 자료와 추억, 감정을 공유하는 ‘팬카이브’ 페이지도 열린다. 오는 12월에는 1980~90년대 음악 팬과 아티스트를 연결하는 커뮤니티 ‘스테이션’도 론칭한다. BTS로 치면 ‘위버스’ 같은 플랫폼이다.

콘텐츠로는 ‘이태원 프로젝트’가 야심작이다. 1950년대 온갖 문화의 근원지였던 이태원을 집중적으로 다루려 한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겨냥해 제작 중이다. ‘아카이브K’ 시즌2도 구상하고 있다. “가요제 이야기를 꼭 넣고 싶고, 하드록부터 록발라드까지 록에 대해서도 쭉 다룰 생각이에요. 그리고 조용필 선생님 꼭 모시고 싶고요. 하고 싶은 게 너무너무 많아요.”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2021-11-1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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