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이 만난사람] 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는 ‘지슬’의 오멸 감독

[김문이 만난사람] 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는 ‘지슬’의 오멸 감독

입력 2013-02-21 00:00
업데이트 2013-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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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 껍질 걷어내고 제주 4·3항쟁 속살 이야기 “세계인들이 울더군요”

흔히 ‘공간’이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곳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역사 속의 공간에는 반드시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바로 ‘기억’과 ‘흔적’이다. 세월이 지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한 공간 속으로 잠시 들어가 본다.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에는 ‘큰넓궤’라는 동굴이 있다. 곶자왈 잡목 덤불이 많아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이곳은 4·3항쟁 당시인 1948년 11월 120명의 동광리 주민들이 토벌대를 피해 50여일간 추위와 공포에 떨며 살았던 공간이다. 서로 돌아가며 보초를 서고 식량을 준비하고 물을 떠오며 공동체 생활을 했다. 좁고 험한 공간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채 한 가닥 남은 운명에 희망을 걸고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을 겨냥한 총부리 앞에서는 오래가지 못했다. 숨어 있던 공간이 발각되고 주민들은 산속으로 피신했지만 대부분 체포돼 죽임을 당했다.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망자들에겐 나중에 마을에서 생전에 입었던 옷가지 등을 묻고 헛묘를 세워 영혼을 달래줬다. 이러한 공간은 65년 동안 봉인됐다. 세월이 지난 지금, 기억의 필름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지난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계동에 위치한 ‘지슬’ 영화 배급사 사무실에서 만난 오멸 감독이 인터뷰를 마치고 잠시 자세를 취했다.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지난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계동에 위치한 ‘지슬’ 영화 배급사 사무실에서 만난 오멸 감독이 인터뷰를 마치고 잠시 자세를 취했다.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영화감독 오멸(42)의 ‘지슬’은 4·3항쟁이 일어난 1948년 겨울 ‘해안선 5㎞ 밖의 주민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모두 사살하라’는 미군정의 소개령이 떨어진 뒤 ‘큰넓궤’ 동굴에 숨은 주민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제례(祭禮) 형식을 따라가며 숨진 원혼들을 위로하는 장면들을 통해 당시의 슬픔과 비극을 고스란히 기억해내면서 유머와 해학까지 곁들인다. ‘지슬’은 생존과 희망을 상징하는 ‘감자’의 제주도 방언이다. 흑백으로 처리된 이 영화는 최근 세계 최고 권위의 독립영화 축제인 ‘제29회 미국 선댄스영화제’(유타주 파크시티)에서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최고상인 ‘월드시네마 극영화’ 부문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또 지난 12일 프랑스에서 열린 제19회 브졸아시아 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최초로 황금수레바퀴상(장편영화 경쟁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이에 앞서 ‘지슬’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넷팩상(NETPAC 아시아영화진흥기구)과 한국영화감독조합상 감독상, 시민평론가상, CGV무비콜라주상 등 4개 부문을 휩쓸며 이미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제42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초청에 이어 세계 각국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어 올해 이래저래 국내외적으로 가장 주목할 만한 영화로 화제가 되고 있다. 데뷔 3년차인 40대 초반의 젊은 감독이 이루어낸 일들이다. 이 영화는 다음 달 1일 제주도를 시작으로 21일 서울과 전국에서 개봉된다.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계동에 있는 영화 배급사 사무실에서 오씨를 만났다. 선댄스영화제와 로테르담영화제에 참석했다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되고 언론과 인터뷰를 하느라 그런지 피곤한 기색이었다. 자리에 앉으면서 “사실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말한다. 그래도 ‘지슬’이 연이어 국내외 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고 있으니 좋은 일 아니냐고 인사말을 건넸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영화제에서 직접 느낀 현지 반응이 어떠했는지 먼저 물었다.

“미국의 한 60살쯤 된 아주머니였습니다. 영화 상영이 끝난 후 저한테 ‘영화 보면서 내내 울었다. 정말 고맙다’고 하더군요. 아울러 관람객들로부터 미군이 (4·3 당시)충분히 그러한 일을 했으리라고 수긍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한 4·3항쟁이 6·25와 연결된 것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지요. 제주에 숨어 있던 4·3을 세계에 드러냈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오 감독은 이 영화에서 4·3항쟁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기억의 공간들 속에서 사람을 통해 은유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주목받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는 “4·3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사람 중심으로 봐야 한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밀착해서 얘기하고 싶었다”면서 작품 구상은 5년 전 당시 동광리 피란처였던 ’큰넓궤’ 동굴에 들어갔다 오면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억새 움직임은 슬픈 춤으로 보였고 동굴 주변을 감아도는 바람 소리는 당시의 울부짖음으로 들려와 영화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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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멸 감독
오멸 감독
“영화를 찍을 때 오직 바라는 것은 하나였습니다. 4·3에 대한 재인식을 할 수 있는 그런 영화를 생각했습니다. 이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래서 살아 있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사실 4·3은 미군이 개입됐기 때문에 냉전시대에 파묻혀버린 이야기였습니다.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는 더욱 관심이 없지요. 그 때문에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스스로 생명력을 갖고 어떤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죠. 그렇게 하는 길이 바로 국제영화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상을 받는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다만 ‘지슬’이 되도록 많은 세계인이 봐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런 그의 바람은 계속 진행형이 될 예정이다. 미국 워싱턴과 샌프란시스코 영화제 등을 비롯한 20여개 국에서 벌써 초청의 손길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최근 3년 동안 ‘뽕똘’ ‘어이그, 저 귓것’ ‘이어도’ 등 모두 네 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모두 제주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토속적인 제주 방언이다. 비록 태어나고 자란 곳이 제주도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서울에서 영화를 찍고 승부를 걸 텐데 왜 제주 섬을 고집할까.

“처음에는 예산을 맞추려고 했지만 찾으면 찾을수록 보물섬처럼 얘기가 많은 곳이 바로 제주도입니다. 다른 영화처럼 풍경이 아닌 섬사람을 찍겠다고 다짐했지요.”

그는 가난한 제주 산간마을에서 태어나 남녕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주대학 미술학과에 진학해 미술공부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림을 그릴 때 자신 속에 내재된 절망과 고통을 표현해보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작업실을 부숴버리는 등 방황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러 어느 날, 미술을 그만두기로 하고 연극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미술을 하면서 틈틈이 연극과 무대미술에도 참여했는데 바로 그것이 치유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술을 할 때 철학적 내공이 많이 부족하니까 계속 허덕거렸지요. 그때 연극이 도움을 줬던 것 같아요. 연극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힘이 강하잖아요. 서로서로 보듬어주고 같이 고민하면서 하나를 이루어나가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거든요. 연극만이 가진 인간적인 힘이 있어요.”

그는 평소 실험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전위극을 만들어 무대공연도 하고 ‘머리에 꽃을’이라는 거리예술제도 만들었다. 이때부터 자신 속에서 찾고자 했던 예술적 욕심을 버리고 타인을 위한 행위로 방향을 틀었다. 시청 앞 등에서 ‘거리공연을 살립시다’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대중들과 함께 공유하기 시작했던 것. 얼마 후에 거리공연 때 만난 친구들과 ‘자파리연구소’라는 팀을 만들었다. 또 이들과 함께 텐트생활을 하면서 제주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거리공연과 축제를 벌였다. 하지만, 현실은 험난했다. 거리축제로 나선 지 8년쯤 되자 고지서가 방안에 잔뜩 쌓였다. 어느새 신용불량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때 독하게 마음먹고 만든 영화가 ‘어이그, 저 귓것’(어이그 저 바보같은 녀석)이었다. 이 영화는 2010년 제6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이어 2011년 ‘뽕돌’로 제12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무비콜라주상, 그리고 ‘이어도’로 서울독립영화제2011 장편경쟁부문에서 디지털 후반작업특별상 등을 받으면서 진가를 발휘했다.

“처음에 만나 함께 동고동락해온 ‘자파리연구소’ 멤버들이 현재 배우와 연출가로 활동하며 우리 팀에서 핵심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뽕똘’에 나온 조은은 제 조카인데 가출 청소년이었습니다. 연극을 시켰더니 치유가 되더라고요. 벌써 6년차 배우가 됐고 얼마 전에는 아시테지여름축제에서 배우상을 받기도 했어요.”

그는 미술 공부할 때 나이 40에 영화를 시작하려고 마음먹었으나 1년 앞당겼고 불과 3년 만에 상복이 터지면서 해외에서도 주목받는 감독이 됐다. 그는 영화수업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비결을 물었더니 “굳이 말한다면 미술과 연극, 거리축제 등을 통해 영화를 접목시킨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면서 “비록 장르는 다르지만, 붓을 들고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가 중요하고 또 종합예술인 영화를 만들면서 그동안 이것저것 저지른 것이 나름대로 기초가 된 것 같다”고 말한다.

영화 제작할 때 돈 때문에 어려움이 많지 않으냐는 질문에는 “예술은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진실로 만들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300만~800만원이면 된다”고 대답한다. 그는 제주시내에 소극장과 극단 ‘자파리’를 두고 있다. 그가 만드는 영화 대부분 극단(자파리 필름)에서 제작된다. 상업영화처럼 돈을 들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지만 감동 있게 제작하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어떤 영화를 준비하고 있을까.

“신화와 해녀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제주인의 삶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지 늘 고민하고 있지요.”

아직 미혼이다. 왜냐고 했더니 “그동안 부모한테 효도 한 번 못했고 처자식을 먹여 살릴 형편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다”며 웃는다.

선임 기자 km@seoul.co.kr

■ 오멸 감독은

본명은 오경헌이다. 오멸은 미술공부할 때 필명으로 사용했다. 1971년 제주시 영평동에서 출생한 뒤 남녕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제주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30살에 미술을 그만두고 연극과 거리공연에 나서 ‘머리에 꽃을’이라는 거리예술제, 극단 ‘자파리연구소’ 등을 만들었다. 39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해 ‘어이그, 저 귓것’(2010), ‘뽕똘’(2011), ‘이어도’(2011), ‘지슬’(2012) 등 네 편의 장편영화를 제작했다. 현재 예술창작집단 극단 자파리연구소 대표. 제주독립영화협회 공동대표 등을 맡고 있다. 주요 수상으로는 2010년 제6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어이그, 저 귓것), 2011년 제12회 전주국제영화제 무비콜라주상(뽕똘), 서울독립영화제2011 장편경쟁부문 디지털 후반작업특별상(이어도) 등에 이어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지슬’로 넷팩상(NETPAC 아시아영화진흥기구)과 한국영화감독조합상 감독상, 시민평론가상, CGV무비콜라주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했다. 최근에는 제29회 선댄스영화제에서 ‘월드시네마 극영화’ 부문 심사위원 대상, 제19회 브졸아시아국제영화제에서 황금수레바퀴상 등을 수상했다.

2013-02-21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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