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 억류’ 사태, 스웨덴이 물꼬

‘사이공 억류’ 사태, 스웨덴이 물꼬

입력 2011-02-21 00:00
업데이트 2011-02-21 10:38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1975년 베트남 사이공(현 호치민)이 공산정권에 함락된 이후 5년 가까이 억류됐던 사이공 주재 한국 대사관 외교관들이 풀려난 데에는 스웨덴 정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동맹·우방국들은 오히려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가 언론의 비판까지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21일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한국대사관 직원들과 교민들은 1975년 4월 제럴드 포드 미 대통령이 베트남 주재 미국인들에 대해 전원 철수령을 내림에 따라 미국인들과 함께 탈출을 시도했다.

 이에 따라 김영관 주 베트남 대사와 교민 등 60여명이 미국이 제공한 피란민 수송선에 몸을 실었으나 대사관원 8명과 교민 150명은 교통편을 구하지 못해 사이공에 잔류하게 됐다.

 베트남 당국은 이 가운데 이대용 공사와 안희완 2등 서기관,서병호 주재관 등 한국 외교관 3명을 체포해 사이공 시내 치하오 형무소에 수감했다.당시 처참했던 형무소 생활은 이 공사가 귀국후 1981년 펴낸 ‘사이공 억류기’에 생생히 묘사돼 있다.

 한국 외무부는 미국,프랑스,일본,스웨덴,유엔 난민고등판무관(UNHCR),국제적십자위원회 등 가능한 모든 채널을 총동원해 전방위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미국과 프랑스,일본 등 동맹과 우방국들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만 밝힐 뿐이고 적극적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프랑스는 전세기로 교민들을 나르는데 도움을 줬지만 석방문제에는 미진한 모습을 보였고,미국은 월남전의 여파로 월남 임시정부와의 관계회복에 시간이 걸리던 참이었다.

 특히 미국은 자국민 우선 철수원칙을 내세워 월남전 파병까지 감행했던 한국에 대해 매정한 조치를 가했으며 1975년 4월 30일 미군은 철수 작전을 시작하면서 자국민을 다 실어 나르지 못할까봐 최루탄을 뿌리기까지 했다.

 미국은 또 한국인 철수를 위해 미 해병대를 파병해 달라는 한국의 요청을 거부하기도 했고,잔류 한국인들의 구출에 대해 “일본.프랑스 대사관에 알아봐라”는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UPI 통신은 1975년 5월 11일 “한국은 (베트남전) 파병국인데 미국이 마지막 철수 단계에서 한국인을 거절했다는 소식이 한국에 들어가면 이는 한국전쟁이 재발했을 때 미국이 공약을 지킬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민 국가가 스웨덴이었다.정부는 베트남 임시정부와 소통이 원활했던 스웨덴 정부와 접촉해 석방 해결의 전권을 사실상 위임했고 당시 라이프란드 외무차관이 직접 나서 한국인 공관원들에 대한 석방 협상을 중재했다.

 라이프란드 차관은 1976년 5월 베트남 정부와 처음으로 접촉한 이후 “석방을 검토해 보겠다”는 답변을 얻어냈으며 같은 해 7월1일에는 인도적 협약인 빈 협약에 따라 공관원들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교섭 2년 만인 1978년에는 베트남 정부가 한국에 수감 중인 북한요원들과의 교환을 조건으로 우리 공관원들을 풀어주겠다는 첩보를 우리측에 전달하기도 했다.

 이를 전후해 한국은 1977년 말부터 프랑스 정부를 통해 베트남에 수감중인 우리 공관원 3명과 국내에 수감된 북한 간첩과의 맞교환을 제안했다.프랑스의 제안을 받은 베트남 정부는 팜반동 수상 지시로 북한에 의사를 타진했고,북한은 맞교환에 동의하며 우리 정부가 석방할 간첩 명단과 석방 조건 등을 요구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후 교환 협상은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고,북한은 공작원 2명을 베트남에 파견해 우리 공관원들을 상대로 망명서 작성을 강요하는 등 납북 시도까지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와중에 한국은 원활한 석방 협상을 위해 79년부터 세계보건기구(WHO)를 통한 우회적인 원조를 베트남에 제공하기도 했다.

 이 같은 외교적 노력에 따라 억류 공관원 3명은 결국 1980년 4월11일 석방돼 다음날 김포공항에 돌아왔다.

 라이프란드 외무차관은 사이공에서 이들을 인계받아 김포공항까지 동행함으로써 자신의 소임을 끝까지 완수했다.이에 한국 정부는 라이프란드 외무차관에게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하고 사의를 표했다.

 

연합뉴스
많이 본 뉴스
공무원 인기 시들해진 까닭은? 
한때 ‘신의 직장’이라는 말까지 나왔던 공무원의 인기가 식어가고 있습니다. 올해 9급 공채 경쟁률은 21.8대1로 32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공무원 인기가 하락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낮은 임금
경직된 조직 문화
민원인 횡포
높은 업무 강도
미흡한 성과 보상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