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방중 김일성 파격의전 받아

1982년 방중 김일성 파격의전 받아

입력 2013-04-02 00:00
업데이트 2013-04-02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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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부 “열렬한 환영은 실제 성과가 크지 않기 때문”

북한의 김일성이 1982년 9월 7년 만에 다시 중국을 방문하고 중국으로부터 파격적인 의전을 받자 정부는 전 재외공관을 동원해 방중 배경과 방중시 논의사항 파악에 나섰다..

연합뉴스가 2일 입수한 외교문서 ‘김일성 북한 주석 중공 방문’(1982년 생산)에 따르면 정부는 1982년 7월 13일 베이징발 외신보도를 통해 김 주석의 중국 방문 계획을 처음 파악했다.

이어 중국의 당 대회가 열리는 9월 초 방문설, 당 대회 이후인 10월 방중설, 10∼12월 방문설 등이 각 공관에서 잇따라 보고됐다.

실제 김일성이 방문한 것은 9월 16일부터 25일까지였다.

김일성이 방중하면서부터는 중국의 파격 의전에 정부의 관심이 집중됐다.

특별 열차편으로 김일성이 베이징 역에 도착했을 때 중국에서는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 덩샤오핑(鄧小平) 당 군사위 주석 등 최고지도부가 직접 나가 환대했다. 우리 정부도 “고령의 약간명을 제외하고 중국 최고지도부가 거의 전원 역까지 나왔다”고 당시 평가했다.

중국의 파격 의전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김일성의 시안 방문에는 후 총서기가, 쓰촨성 방문에는 덩 군사위 주석이 각각 동행했다. 시안에서는 10만명 이상의 시민이 나와 환영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환영과 달리 실제 성과는 크지 않았다고 정부는 판단했다.

특히 후야오방이 환영 연설에서 김일성을 위대한 지도자라고 지칭한 것은 오직 2번뿐이었고 미국을 강하게 비판한 김일성과는 달리 미국을 직접 비난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토대로 양측간 정책 측면에서는 온도차가 있다고 평가했다.

당시 외무부는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 및 고려 연방제 지지 획득에 있어 중공측의 강경한 표명을 얻지 못했다”면서 “한반도의 전쟁 재발을 원치 않으며 한반도의 안정이 중공의 주된 관심사”라고 분석했다.

외무부는 또 “북한이 김정일 권력세습 추진에 대한 중공측의 양해를 묵시적으로 획득했다”고 봤다.

외무부는 이런 분석을 토대로 “김일성의 방중에 대한 열렬한 환영표시는 방중 결과 성과가 크지 않은데 대한 보상적 의미”라면서 “이번 방중에 시급한 현안 과제가 없었던 점을 감안할 때 실질적인 방문성과는 기존 관계를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며 정치적인 우호 협력의 시위 효과에 더 큰 비중이 있다”고 평가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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