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8회] “우리 모두 살아서 고향 인천에서 만나자…그때까지 건강하라!”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8회] “우리 모두 살아서 고향 인천에서 만나자…그때까지 건강하라!”

입력 2018-02-27 16:58
업데이트 2018-02-2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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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창립과 활동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 소위·24세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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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지역의 6년제 중학교 1~3학년에 재학 중에 부산까지 20일 동안 걸어가서 자원입대 후 참전한 인천 출신 통신병들의 통신교육 수료 기념사진. 1951년 2월 28일 부산육군통신학교에서 촬영.
인천지역의 6년제 중학교 1~3학년에 재학 중에 부산까지 20일 동안 걸어가서 자원입대 후 참전한 인천 출신 통신병들의 통신교육 수료 기념사진. 1951년 2월 28일 부산육군통신학교에서 촬영.
최수보 인터뷰

일시 1997년 7월 7일

장소 서울 종묘 이상재 선생 동상 앞

대담 최수보(고려대 2학년때 자원입대)

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

6·25사변과 인천학도의용대 남동지대 창립

내가 고려대학교 2학년 재학 중에 6·25사변이 일어났다. 1950년 여름에 북한 괴뢰군(傀儡軍)들은 어린 학생들을 인민의용군으로 끌고 갔는데 대부분 실종되었고 9·15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남동지역 학생들은 스스로 학생단체를 조직하여 호국활동을 시작했다.

10월 중순 경 남동지역 학생단체는 인천학도의용대 남동지대로 등록하고 활동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인천학도의용대의 대장은 나와 같은 학교 고려대학교의 같은 학년인 2학년 대학생이었던 이계송이었다.

남동지대 관할 구역은 논현, 고잔, 남촌, 수산, 도림, 운연, 장수, 만수, 서창 등 9개동이었으며 서쪽으로는 바다를 끼고 있는 넓은 염전지대로 되어있는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다.

최수보 남동지대장이 47년간 보관하고 있었던 인천학도의용대 남동지대 대원·전사자 명단

<대원 명단>

지대장 : 최수보 고려대학교 2학년 통신병

부지대장 : 김두진 인천상업중 6학년 통신병

총무부장 : 천성호 인천중학교 5학년 해병 6기

훈련부장 : 박규근 인천동산중 4학년 통신병

정보부장 : 천지선 인천공업중 5학년 해병 6기

정보계장 : 오정진 인천공업중 4학년 해병 6기

대원 : 최장석 인천중학교 6학년 해병 6기

강인석 인천공업중 6학년 해병 6기

박상철 인천농업중 6학년 해병 6기

최기석 인천공업중 5학년 해병 6기

천지선 인천공업중 5학년 해병 6기

윤기덕 인천상업중 4학년 해병 6기

최명남 인천영화중 4학년 해병 6기

윤종근 인천상업중 4학년 해병 6기

이석우 인천영화중 3학년 통신병

오재곤 인천해성중 3학년 통신병

김대성 인천해성중 3학년 통신병

윤종근 인천공업중 3학년 통신병

박명수 인천영화중 3학년 통신병

김기학 인천해성중 2학년 통신병

김기철 인천동산중 1학년 통신병

<전사자 명단>(해병 6기)

유기호 : 인천중학교 6학년·1951년 4월 5일 전사

천영돈 : 인천상업중 5학년·1951년 8월 1일 전사

최봉산 : 인천상업중 4학년·1952년 6월 4일 전사

전동현 : 인천해성중 4학년·1951년 4월 5일 전사
1951년 6월 7일 수도사단 향로봉 전투에서 이경종(당시 16세).
1951년 6월 7일 수도사단 향로봉 전투에서 이경종(당시 16세).
1950년 12월 18일 남하

늦가을에 들어서자 전쟁 양상은 중공군의 갑작스런 전쟁 개입으로 우리 국군과 UN군이 밀리기 시작하더니 12월에 접어들어서는 더욱 악화되어, 우리 군이 후퇴하게 되어 급기야는 우리 인천학도의용대 전 대원은 남하(南下)할 준비를 하고 1950년 12월 18일날 축현국민학교에 전원 집합 하라는 훈령을 받게 되었다.

“최수보 대장, 우리 아들 잘 부탁하네!”

그때 어린 대원들 부모님들께서는 대장인 나한테 부탁하기를 “어린 동생이나 다름없는 우리 자식들 잘 인도해 달라”는 말을 하셨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축현국민학교에서 출발하여 부산까지의 긴 여정을 시작하였다.

그날 우리는 구월동을 지나 밤 늦도록 걸어서 첫날 도착한 곳이 안양이었다. 이튿날 다시 행군하여 도착한 곳이 수원이었다.

우리들은 크리스마스 날 대구에 도착하였고, 계속 남하하여 구미를 지나 낙동강을 건너 도착한 곳이 밀양이었다. 그때 밀양에서 인천학도의용대 권유상 제3대대장을 만났는데 “마산(馬山)에서 집결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튿날 우리들은 다시 마산으로 행군하기 시작하였다.

중학교 4~6학년은 마산에서 해병대로 입대

이튿날 마산에 도착했다. 나는 최종 목적지가 마산으로 알고 있었다. 1951년 1월 초 고향 인천은 또다시 북한공산군에게 점령당했다.

마산에서 해병 신병모집이 있다하여 우리 대원들을 전부 데리고 갔었는데 해병 신병 모집관이 저학년 대원들은 탈락시키고 고학년 대원들을 골라서 해병대 신병 훈련소로 데려갔다.
1952년 9월 5일 서울 인왕산에서, UN군 사령부 501부대 영문 번역병 시절의 최수보 중사.
1952년 9월 5일 서울 인왕산에서, UN군 사령부 501부대 영문 번역병 시절의 최수보 중사.
“고향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모두 건강하라!”

그때 어린 대원들이 없었더라면 나도 해병대에 입대하는 것인데 해병대에 못 입대한 나이 어린 대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 간부진은 해병대에 입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해병대 신병 모집에 합격한 남동지대 대원들에게 “다시 고향에서 우리 모두 만나자. 그리고 다시 만날 때까지 모두들 건강하라”고 마지막 당부의 말을 하고 헤어졌다.

중학교 1~3학년은 부산에서 통신병으로 입대

나머지 우리들은 마산항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당시 부산진국민학교에 있던 육군 제2훈련소에 전원 입소하였다. 이렇게 제2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후 해병대 신병 모집에 탈락한 인천학도의용대 남동지대 중학교 1~3학년 학생들과 나는 부산육군통신학교로 입교하게 되어 통신교육을 2개월 받고 통신병이 된 후 마산부두에 있는 통신부대에 배치 받았다.

장교로 현지 임관제의를 받았으나 거절

나는 중학생 동생들과 함께 자원입대했기 때문에 부산 육군 제2훈련소에서 장교로 현지 임관시켜 주겠다고 제의했을 때도 어린 동생들과 같이 군복무하기 위하여 거절했다.

중학생 동생들과 같이 사병으로 자원입대

나는 사병으로 군복무를 하던 중에 다쳐서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하였다. 이후 1953년 12월 17일 인천을 떠난 지 만 3년에서 하루 전날에 수도육군병원에서 의병제대를 하여 꿈에 그리던 고향 인천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나는 6·25 남침 전쟁으로 인천학도의용대 남동지대장이 되어 고향 후배들을 이끌고 인천에서 부산까지 내려가서 자원입대하였다.

당시 나의 마음은 어떻게 해서든지 어린 대원들을 잘 보호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어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급변하는 당시의 시국변동을 내 힘만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끝까지 잘 따라준 후배 대원들을 조금도 잊어 본적이 없다.

오늘까지도 평생 동안 가슴 아픈 기억은 내가 이끌고 데리고 갔던 4명의 대원(유기호, 천영돈, 최봉산, 전동현)이 전사(戰死)한 것이다.

오늘 반가운 일은 인천학도의용대 참전 역사를 편찬하겠다는 이경종과 이규원 치과 원장 부자(父子)가 있어서 이제 우리 대원들의 행적이 햇빛을 보게 되었으니 여한이 없게 되었다. 부디 이 역사적인 편찬사업이 무사히 마무리되기를 빌 뿐이다.

글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다음 호에 9회 계속
1997년 7월 7일 서울 종묘 이상재 선생 동상 앞에서 인터뷰를 마친 최수보 대장.
1997년 7월 7일 서울 종묘 이상재 선생 동상 앞에서 인터뷰를 마친 최수보 대장.
최수보 ▲인천학도의용대 남동지대 대장 ▲고려대 2학년생

1928년 1월 1일 : 인천 남동구 논현동 출생

1950년 6월 25일 : 고려대학교 2학년생

1950년 12월 18일 : 인천학도의용대 남동지대 소속 중학생 50여명을 이끌고 경상남도 통영 충렬초등학교(국민방위군 제3수용소)를 향해 걸어서 남하를 시작함.

1951년 1월 10일 : 수원, 대전, 재구, 밀양, 삼랑진을 지나면서 얼거나 굶어죽은 국민방위군 시체를 보고, 마산역에서 경상남도 통영의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충열국민학교)로 향해서 남하하지 않고 부산으로 가서 육군통신병으로 자원입대.

1953년 12월 17일 : 23살 고려대학교 2학년 대학생이어서 장교로 현지 임관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고 중학생 동생들과 사병으로 근무하다가 부상으로 인해 의병 명예 제대.

참전기 8회를 마치며

인천학도의용대 최수보 남동 지대장님은 23살 대학생이기 때문에 장교로 현지 임관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고향 인천 남동의 중학생 후배들과 사병으로 자원입대하였습니다.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마산과 부산까지 무사히 이끌어 준 훌륭한 일을 했지만 누구에게도 자랑한 적이 없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섭섭해 하지 않았던 형이 인천에 살았었습니다.

이규원 치과 원장(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1997년 2월 16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1997년 2월 16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1952년 6월 12일 문산 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이중수(인천영화중학교 4학년)의 묘를 참배하고 있는 삼부자. 왼쪽부터 이경종 6·25 편찬위원, 이근표 6·25 참전관장(이경종 큰손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6·25 편찬위원장).
“큰아들인 이규원 치과 원장(6·25 참전사 편찬위원장)이 사비 4억원을 들여서 6·25 전사 인천학생·스승 추모관을 건립하여 인천 중구청에 기부채납하려는 제안을 인천 중구청은 거절하였다.

추모관 기부채납이 이뤄지기를 기대해본다.”

6·25 참전 인천학생 이경종(현 85세)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때 자원입대·참전

인천학생 6·25 참전관 설립자·초대 관장
2018-02-28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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